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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 (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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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 (계 2:1-5)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제일 먼저 나오는 교회가 에베소 교회다.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에 대해 칭찬 받는 교회로서 거짓 사도를 잘 들어내는 분별력 있는 교회였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 하는 거짓 목자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교인들인데 에베소 교회는 영분별의 능력이 분명했다.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한 것도 같은 원리였다. 악한 자가 악한 자인줄 모르기에 악한 자를 교회 안에 끌어들인다. 

제가 아는 한 교회는 서산에 있는데 전도사를 채용했다. 무료로 봉사해 드린다는 말에 채용을 했는데 그 교회의 장로님을 아주 극진히 섬겼다.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장로님은 이 젊은 전도사의 섬김에 감동을 받아 어쩔 줄 모르는데 바로 이 사람이 신천지에서 온 전도사였다. 그래서 장로 부부가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부인만 나온다고 한다. 누구나 분별력이 없으면 속는다. 분별력이 없으면 이단을 교회 강단 앞에 세우고 이단에게 말씀을 전하게 한다. 악한 자들을 교회 안에서 용납하는 우(愚)를 범한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점에서 특별하다. 결코 속지 않는다. 섞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분명한 에베소 교회의 문제점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다. 처음 사랑! 처음 사랑은 얼마나 순수하고 얼마나 열정적인가? 처음 사랑은 설레임과 뜨거운 열정이 담겨 활활 타오른다. 처음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는 사랑이다. 

그런데 신앙 생활에도 처음 사랑이 중요하다. 다른 것은 다 훌륭해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신앙의 감격이 사라진다. 첫 사랑에 의해 움직이던 처음 행위는 물, 불을 가리지 않는다. 주님이면 된다. 그런데 그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형식만 남은 신앙, 조직과 이론만 남은 냉랭한 성도가 되기 쉽다. 교회의 크고 작음이 교회 생명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가 교회 생명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처음 사랑을 지니고 그 첫 사랑 같은 신앙 생활을 하느냐가 생명의 문제인 것이다.   

그럼 주님이 책망한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는 어떤 것인가? 

1. 처음 사랑의 모습은 말씀을 뜨겁게 사모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행19:9~10)

역사서인 사도행전으로 가 보면 사도행전 19장과 20장은 에베소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역이 나온다. 행19:9~10을 보면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라고 하였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은 말씀 사랑이다. 에베소 교회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진지하였다.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하는 말씀의 사역은 2년간 되풀이 되었다. 그것도 ‘날마다’였다. 일주일 단위가 아니었다. 얼마나 말씀에 사로잡혔으면 말씀을 듣는 일을 매일 매일 반복하는가?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그려진 에베소 교회는 그 아름다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러 하고 있으니 말씀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다시 불을 붙이라는 뜻이다. 매일 매일 모이고 또 모이는 것처럼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말씀을 듣는 일에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14일 특별새벽집회도 힘들어 하는 것은 아닌가? 2년간 매일은 고사하고 14일도 고민하는 것은 아닌가? 첫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100일 말씀 공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열정이기 때문이다.   

2. 처음 사랑의 모습은 마술을 청산하는 결단의 행위로 나타났다. (행19:18~19)

행19:6에서 에베소 교회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행19:12을 보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 마술하는 이들은 이것이 너무 놀라워 흉내내는 축사 행위도 하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복하였다. 행19:19을 보면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가 참 진리임을 알고 모든 귀신을 쫓아내는 왕 중의 왕 되심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예수님만이 귀하시기에 미신 따위는 소멸시키고 마술 따위는 정리하는 과감한 결단력을 보이는 것이다.

수 년전 영신학교 앞에서 동네 사람이 교회에 나왔다. 그런데 교회를 다녀온 후 심방을 가기로 한 그 집에 걸어놓은 벽시계가 방바닥에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그것에 놀라서 그 새신자는 결국 심방을 거절하고 교회를 포기하였다. 미신을 믿는 자는 작은 사건에도 두려워한다. 잘못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주님만을 높이며 쓸데없는 거짓말로 현혹시키는 마술의 책, 미신의 책을 다 모아서 태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과감한 결단이다. 어디서 이런 힘이 왔는가? 주를 알게 된 첫 사랑의 감격 때문이다. 그 첫 사랑의 환희가 결단의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다.  

3. 처음 사랑의 모습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영성적 행위로 나타났다. (행20:36)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떠나가려는 바울의 설교는 비장하고 행20:24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행20:35에 가서 모본을 보인 자신의 청직이 삶을 소개하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 일을 한 후 행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었다고 쓰여 있다. 

말씀을 한 후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마무리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기도 없이 끝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 다 마쳤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는 것은 살아있는 영성이다. 그들의 기도에는 눈물이 따라왔다. 바울과 헤어짐을 슬퍼하기에 서로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는 이 모습은 순수하고 단순한 영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이 영성적 행위는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돌보심을 기다리는 태도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행위는 정말 아름답다. 사도와 헤어지는 이별을 근심하며 하나님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기도의 영성은 우리가 배워야 할 승리의 영성이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세 가지 자랑스러운 처음 사랑, 처음 행위가 있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이 처음 사랑, 처음 행위의 영성을 너무 쉽게 잃어버렸다. 김철손 교수는 요한계시록 신학에서 에베소 교회는 교회 시대를 7등분할 때 원시 기독교 시대를 보여주는 주후 100년의 교회 시대라 한다. 에베소란 말은 욕망이란 말로 신앙의 욕망, 신앙의 열정이 식어버린 처음 교회를 안타까워하는 단어다. 

사랑이 꺼지면 문제다. 교회 생활은 사랑의 원유가 공급되어야 한다. 사랑이 타오르면 힘들 것이 없다.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 그런데 사랑이 식어버렸다. 오늘 계2:5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디서 잘못 되었는가? 왜 헌금하지 못하고 왜 손해 보지 못하며 왜 양보하지 못하면서 계산만 하는 삶을 사는가? 섬김의 일 앞에서 핑계와 변명으로 사는가? 돌아서야 한다. 신앙적 욕망에 사로 잡힌 첫 사랑의 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

여기 ‘생각하라’는 말은 잘못된 신앙의 사건과 기억을 돌이켜 생각하라는 것이다. 초대 원시 기독교회와 사정은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신앙의 기억을 해보라는 뜻이다. 전도를 나갔다가 낙심했는지, 믿었던 교회 권사님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인지, 세상 언론의 공격 때문인지 생각하라는 기억의 촉구다. 생각하라. 어디서 주저앉았나 생각하면 이해가 밀려온다.  

② 첫 사랑의 신앙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개하라.

너의 잘못만이 아니다. 나의 부족한 이해심도 잘못이다. 기억해 보는 것, 생각해 보는 것과 회개가 같이 나온다. ‘내가 너그러울걸 주님이 주신 사랑의 용서를 외면했구나!’ 좋은 신앙의 기억을 통해 돌이키는 것이 처음 행위를 지키는 지름길이다.  

③ 첫 사랑의 신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 

금번 사순절 특별새벽집회 기간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돌아가자.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을 때 처음의 감격과 사랑, 세례 받고 났을 때 처음 가졌던 신앙의 결단, 그것을 붙잡자!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 처음 행위가 무엇인지 알았다. 말씀을 배우는 열정, 마술과 미신을 청산하는 결단력,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간구하는 무릎 꿇는 기도의 영성이었다. 그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였으니 다른 것을 더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 세 가지 행위, 예수 믿고 난 후 보여줄 수 있었던 열정, 결단력, 눈물의 영성을 지닌 성도가 되자.   

처음 행위를 갖지 못하면 분명코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다. 촛대는 교회다. 주님이 교회를 붙잡지 않는다면 교회는 무너진다. 우리가 냉랭하게 식어가는 동안에 교회는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아직 첫 사랑의 불이 타고 있다. 2011년에 교회를 해외에 2개 봉헌하고 2개는 필리핀, 중국에 건축 중이었다. 2011년에 어떤 성도들은 마음을 모아 헌금하여 일부분의 빚도 갚았다. 1년 내내 기도의 릴레이에 계속 몸을 드린 이도 있다. 아무쪼록 식어서는 안된다. 모든 성도가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다 붙잡도록 하자. 에베소 교회가 보여주었던 주님을 향한 욕망, 그 첫 사랑의 행위를 우리 교회에서 꽉 붙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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