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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명령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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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명령 (마 11:28-30)

“집안이 나쁘다고 한탄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한탄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배운 게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를 극복하고 나니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나의 환경보다 나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징기스칸의 태도가 징기스칸을 만든 것입니다. 부정적인 태도보다는 긍정적인 태도, 소극적인 태도보다는 적극적인 태도, 비관적인 태도보다는 낙관적인 태도, 배움을 외면하는 태도보다는 배우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성공의 열쇠입니다. 명령을 농담으로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명령을 명령으로 받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의지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합니다.

1. 내게로 오라

그리스도의 첫째 명령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28절)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가려면 다른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선택은 곧 포기입니다. 예수께로 가려면 다른데는 못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잘못되는 것은 길 잘못 드는데서 비롯됩니다. 사람은 똑같습니다. 어느 길을 가느냐에 인생이 달라집니다. 
  
수고하는 사람이란 일의 양이 과도하거나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힘든 사람입니다. 무거운 짐 진 자 란 의무나 책임을 지고 힘든 사람을 말합니다. 슬픔이나 근심도 무거운 짐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노동자도 사업가도 쉼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안식, 신경적인 안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쉼을 주시고 소생 시켜주시는 생명이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초청하셨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다 오지 않았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모든 사람이 초청을 받았으나 모두들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사업하러 갔습니다. 소를 샀으니 시험해 봐야 한다고 핑계 대고, 어떤 사람은 결혼했으니 아내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사양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혼부부에게 축하 엽서가 왔습니다. “두 분 결혼을 축하합니다. 제 이름을 지금은 못 밝히지만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 연극 입장권을 동봉했으니 꼭 다녀오세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누가 보냈을까? 고마운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집에 와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털린 것입니다. 집을 비우게 하고 모든 귀금속을 가져간 간 것입니다. 약 올리는 메모까지 남겼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지...” 
  
초청자가 누군지 확인하지 않고 갔던 길이 도둑 맞는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예수께로 와서 마시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배는 사람의 심층부를 말합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나는 길이다. 나를 따라라. 귀를 기울이고 내게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현재의 모습 그대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예수 앞에 오라”
 

2. 나의 멍에를 메라!

그리스도의 둘째 명령은 “나의 멍에를 메라”(29절)는 말씀입니다. 

멍에란 “혹사시키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소가 수레를 끌거나 쟁기질을 할 때 목덜미에 올려놓은 구부러진 막대기입니다. 자유로운 행동을 못하게 하는 억압과 구속을 비유한 말입니다. 힘겨운 노동을 강요하는 부역이 멍에이고, 가난한 백성에게 힘겹게 강요되는 세금이 멍에입니다.  
  
멍에도 나름입니다. 고통의 멍에도 있고 영광의 멍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멍에를 벗으려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메라 하시는 첫째 멍에는 “그의 뜻의 멍에”를 메라는 명령입니다. 뜻이란 속으로 먹은 마음입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속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애3:27-28)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멍에처럼 메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 하시는 예수님의 같은 뜻을 품자는 요청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주님의 뜻을 멍에 메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메라 하시는 또 하나의 멍에는 “그의 통치”의 멍에를 메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통제가 없는 자유가 아닙니다. 통제가 없는 자유는 제멋대로 놀아나는 방종입니다. 우리는 죄의 통치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의 통치에서 은총의 통치로 옮겨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통치를 받게 되면 그 분의 통치 안에서 평안과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모세의 통치에 불만인 자는 바로의 통치에는 만족할 것이다”(이스라엘속담) 주님의 통치를 따르면 그것이 복입니다. 
  
예수께서 메라 하시는 세 번째 멍에는 “사명의 멍에”입니다. 주님의 일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 하심은 나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마21:5) 하였습니다. 내가 멍에를 메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의 일을 해야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 못이기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 못 이긴다고 합니다. 주님이 메워주신 사명에 충성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즐겁게 일하시기 바랍니다. 
  
쉬운 일도 어려운 일처럼 달려들고 어려운 일도 쉬운 일처럼 달려들어 즐겁게 일하는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내게 배우라

그리스도의 셋째 명령은 “...내게 배우라”(29절) 입니다.
도적도 대도가 되려면 공부를 해야하고 노름꾼도 노름으로 먹고살려면 공부를 해야한다고 합니다. 차민수라는 사람이 10년 동안 미국 프로포커 랭킹 1위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가 세계적인 고수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엄청 나게 깨져 본 경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LA에서 이민생활을 하면서 도박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는데 모든 재산을 날리고 포커 고수를 찾아갔습니다. 고수는 차민수씨의 포커 실력을 테스트 해보더니 “그 실력으로는 포커로 먹고살긴 힘들겠다.” “공부 좀 해라.” 그러더랍니다. 고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6개얼 동안 제대로 공부를 하여 진짜 타짜가 되었다고 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마7:7)
  
일본 전산을 창업한 나가모리 사장은 늘 배우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장인한테서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들었습니다. 
“군대생활 해보니 밥 빨리 먹고, 목욕 빨리 하고, 용변 빨리 보는 사람이 일도 잘하더라.” 

그는 거기서 힌트를 얻어 직원을 뽑을 때 밥 빨리 먹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160명의 응시자 중에서 15분만에 식사를 끝낸 33명을 합격시켰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지나가는 말을 들어도 배웁니다.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싸우거나 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열심은 강렬했지만 흥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렬하면서도 요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막5:5)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온유하다는 것은 겸손한 것으로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온유는 잘난척하고 으스대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오만한 정신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온유하면 접근하기가 쉽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서 부탁할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롬12:16) 온유함은 과시하고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이셨고 세리와 창기와 식사하셨습니다. 진정한 힘의 대들보는 온유입니다. 분노는 연약하고 인내는 강합니다. 
  
위엄을 가장하고 실제보다 크게 보이려고 과시하는 사람들은 하찮은 사람들입니다. 명예와 존경에 집착하는 사람은 대인이 아니라 소인입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자기 신분에 관심을 덜 가집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요청하는 명령입니다. “내게 오라!” “내 멍에를 메라!” “내게 배우라!” 
배가 움직이게 하려면 선장의 명령이 있어야 합니다. “출발하라!” “방향을 바꾸라!” “속력을 내라!” 이렇게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명령하신 것은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게 오라 쉬게 하리라 하십니다. 
  
우리에게 멍에를 메라 하심은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동역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온유를 배우는 제자가 되어 땅을 차지하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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