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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용납하시오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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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용납하시오 (엡 4:1-3)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징기스칸은 싸움에서 지고 아내를 약탈당했습니다. 자기 여자를 적장의 침대와 베개로 내주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징기스칸은 그 부족과 다시 싸워서 이겼습니다.  징기스칸은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적의 아이를 임신하여서 태산처럼 배가 부른 아내를 본 것입니다.
  
그때 징기스칸은 얼마나 허물어지고 싶었을까요? 징기스칸을 다시 보아야하는 아내의 가슴은 얼마나 후들거리고 눈빛은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징기스칸에게 '너'라고 부를 수 있었던 부하들은 한결같이 아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징기스칸은 적의 아이를 낳아야 했던 여자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고 부하들을 설득했습니다. 지켜 줘야 할 것을 지켜 주지 못해 생겨난 일이기 때문에 아내가 적의 아이를 품은 것은 아내의 책임이 아니라 오히려 지켜 주지 못한 자기의 책임이라고.. 그뿐만이 아니라 징기스칸은 아내를 거둬들이는 것은 물론 아내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였습니다. 자기의 여자가 낳았으니 자기의 아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자신의 태자로 지명함으로써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의 자리를 단단히 했습니다. 

품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까지 품을 수 있었던 징기스칸은 결국 세계를 품은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작은 허물, 실수조차 거부의 구실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같은 민족간에도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원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의 심각성은 심히 우려될 정도입니다.  진보성향이 있는 사람은 보수적인 경향의 사람을 친미주의자, 보수 꼴통이라고 말하며 몰아 부칩니다.  보수성향의 사람은 진보성향의 사람들을 좌익의 사주를 받아 사회를 혼란시키는 빨갱이라고 간주합니다.  서로 대화가 될리 없습니다.  갈수록 대립이 심화됩니다.  무조건 서로 거부하고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안에까지도 스며들어있습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된 한 몸이라는 사실과 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공격적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의 형식이 다르다고, 교회의 정치형태가 다르다고, 강조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다르면 부정하고 사뭇 비난의 수위를 낮출 줄 모릅니다.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도 거절하고 외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가족도 조그만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마음으로 받아주지 않고 거절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명령합니까?  (롬 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본문에서도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용납하라는 말씀은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로 그를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끼리라도 서로 받아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서로 용납하는 자세를 실천해야 합니다.  서로를 거절하지 말고 마음을 열고 용납하므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이 나라와 우리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안에 서로 거절하는 풍토를 씻어내고 용납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1. 왜? -서로 용납하라고 부르셨기에(1)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니까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겨져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 잘났다고 까불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고 먼저 다가오셔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돌아보니 죄악 투성이 삶을 살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소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믿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여기고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에 기고만장해서 가는데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셔서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에게 주는 주엄 열매를 훔쳐 먹으며 배를 채우려고 하는 모습이 구원받기 전의 우리 모습입니다. 하나님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꼴불견입니까?  형편없고 도무지 눈뜨고 보아줄 수 없을 정도로 웃기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시고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먼저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의 피로 다 덮어 정결케하시고 예수님처럼 의롭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창녀와 세리들과 동류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손가락질받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니까 제자들이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이들도 영접하시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죄가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출신이 유대지역이든지 사마리아든지 외국이든지를 가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님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항상 우리를 불러 주실 때를 기억하며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용서가 잘 안되는 사람도 용서하며 용납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형편없는 사람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꾸만 벽을 높이 쌓아 사람들을 거절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처럼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용납한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상대방을 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것은 상대방이 결점 투성이라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좁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도 용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무조건 그를 용납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싫다고 뛰쳐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엄연히 큰 잘못이 있는 아들을 왜 그대로 용납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반갑게 맞아 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불만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뭐라고 하십니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부득이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상처받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돌아올 따뜻한 가정같은 교회가 없어서 아버지를 찾아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일 것입니다.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앞장서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고 차이와 다름을 틀렸다고 비난하지 않고 이해하고 품어준다면 모두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 용납하십시오.  다소 잘못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십시오.  다소 눈에 거스리는 점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십시오.  여러분과 견해가 달라도 서로 용납하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도 용납하십시오.  불만을 품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사람도 서로 용납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을 용납하는 교회, 심지어 알콜 중독자도, 마약 중독자도 용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어떻게? -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2)
  
겸손하지 않으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참는 사람만이 참으로 용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성품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거부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너와는 어울릴 수 없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며 다른 점을 찾아 열거하는 모습이 어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만의 오만이겠습니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서 가장 승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잘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인도하여 출애굽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과 모세의 은혜를 잊고 대들고 거스리며 탓을 하며 아우성쳤습니까?  심지어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하기까지 한 적도 잇지 않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백성들을 모세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포기하고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끊임없이 합니다.  모세는 정말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그 위대함이 바로 온유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자주 부딪치고 힘들 때 온유함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온유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온유한 성품을 갖게 되면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싸우고 갈라섭니까?  가장 큰 이유는 오래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참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부부간에도 사랑한다 하면서 참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식들에게도 참지 못하고 화를 폭발시킬 때가 많습니다.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별 것 아닌 문제인데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리고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오래 참지 못함으로 보는 큰 손해는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식으면 모든 것이 쉽게 싫증이 납니다.  사랑이 빠져버리면 단점만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반면에 사랑이 있으면 좋게 보입니다.  존경이 절로 나오고 이해가 저절로 됩니다.  사랑이 넘치면 실수도 가리워지고 허물도 용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용납이 잘 되지 않으면  '내 마음에 사랑이 남아 있는가?' 물어 보십시오.  

영국의 기자 가운데 스탠리 라는 기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유명한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루머가, 보도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리빙스턴은 성자다. 그가 아프리카를 변화시키고 있다. 또 한 쪽에서는 데이빗 리빙스턴은 사기꾼이다. 그는 선교비의 많은 돈을 가로챘다 그리고 원주민들 대부분이 이탈하고 있다. 엇갈리는 두 개의 보도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자는 그 진상을 알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밀착취재를 합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 3개월이상 밀착취재를 하면서 데이빗 리빙스턴의 일거수 일투족의 생활을 추적하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함께 만났습니다. 

4개월 후 이 스탠리라는 기자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크리스천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 당신이 리빙스턴한테 전도받았느냐? 그러니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느냐? 내가 가만히 보니까 정말 리빙스턴은 엄청난 오해를 받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안팎으로,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도 모든 선교사들이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그를 배신하고 그는 엄청난 코너에 몰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어려운 고난을 묵묵히 참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었습니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참게 만드는가?' 이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인내만은 아니다. 신앙의 힘이다. 나는 데이빗 리빙스턴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싶었습니다. 


3. 용납의 결과는 일치입니다.(3)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드물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분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애인이 됩니다.  그리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몸은 하나로 놔두어야지 둘로 셋으로 나누면 큰 일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께서 하나로 만든 것을 자꾸만 둘, 셋, 넷으로 나눕니다.  그 결과는 큰 고통입니다.  사명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위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그 다음에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하나되는 것이 어려운가를 꼬집은 풍자적인 해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되기 위해서는 서로 용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들지 않으면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마고 내 마음을 넓히는 것이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점만 찾지 말고 공통점과 이해를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미국이 남북 전쟁을 하고 있을 때 포토맥강이라고 하는 강을 사이에 두고 북군과 남군이 대치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달빛이 흐르고 조용한 시간에 군사들은 불안에 떨면서  폭풍 전야와 같은 두려운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군인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그러자 옆에서 따라 불렀습니다. 강 건너편에 소리가 들려졌습니다. 그 쪽도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전선에 노래로 가득 찼습니다. 저들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전쟁은 없었습니다.  근본이 하나임을 모두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임을 깨닫고 나니까 싸울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있는 증거는 일치입니다. 서로 다름을 강조할 때 여러분은 서로가 같은 요인을 찾고 강조하시기 바랍니다. 싸움은 멎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갈등은 사라지고 행복이 깃듭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아프게 한 그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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