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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공간 (행 17: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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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간 (행 17:22-31)

교양인, 남과 어울려 사는 도시인,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균형을 맞춰야 되는 사회인으로서 우리는 젊었을 때부터 점잖해져야 될 필요성을 느낍니다. 제가 기쁜소식교회를 담임하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가 점잖을 필요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크리스찬으로 살기 위해서 터득하는 것은 점잖아야 될 필요성입니다. 

여러 종교, 여러 사상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요구당하는 것은 점잖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습니다. 전투적인 사람 · 시끄러운 사람 · 흥분하는 사람을 우리는 불편해 합니다. 한번 보고 안 볼 것이라면 모르지만 계속해서 봐야 되는 사람 앞에서는 절제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겪어 보셨기 때문에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보니까 우리는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고 나서려고 하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고 남 앞에서 창피한 경우를 피하려고 하고 소극적이 되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믿음의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이러한 불행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합이 이스라엘의 임금이었을 때 그는 이방인 여자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세벨이 시집오면서 자기가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신의 선지자들을 대거 데리고 왔습니다.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신앙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애초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런 변화 앞에 어느 누구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어요. 서로 눈치를 보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신앙은 이스라엘 내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선지자들은 숨기 시작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었어요.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단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언제까지?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할 때까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할과 사람의 역할을 발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하나님이 그것을 방관하셨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 백성이 타종교와 공존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바알신앙을 성장케 하신 것이 아닐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만일 하나님이 이것을 원치 않으셨다면 벌써 중단시키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하나님도 방관하셨다는 뜻이 아닐까? 중세에 가톨릭교회가 타락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이 큰 교회가 잘못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설마 그것을 내버려 두실까? 벌써 일찍 손을 쓰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 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틴 루터를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기 위하여 나가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리앗과 타협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골리앗과 싸우는 것을 믿음의 차원으로 생각한 유일한 사람이 다윗이에요. 다윗 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온 천하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잘못된 신앙 · 잘못된 교회 · 잘못된 신학을 바로잡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엿봅니다. 사람의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믿음의 사람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대중적인 인기 · 여론을 등에 업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 한 사람이에요. 애굽에서 신음하는 백성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 한 사람, 선지자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믿고,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모세의 역할은 바로를 설득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스라엘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바로를 설득하는 것은 오히려 쉬웠어요. 하나님이 내린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바로는 마침내 하나님께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시키는 것은 더 어렵고 더 인내가 필요하고 더 시간이 많이 들었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은 이미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의 섭리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천년이라는 세월동안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설득하는 작업은 더 힘들고 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더 어려워요. 차라리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시는 것은 금방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오래 걸리고 힘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성, 신앙의 어려움뿐만이 아니고 나아가 리더십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리드라는 말이 적절한 번역할 단어가 없습니다. 지도력이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지도한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한민국에는 리더십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리더는 많은데 그들이 리드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리드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국가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국가를 리드해야 되는데 저마다 눈치를 보고 여론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말에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마치 그것이 독재라도 되는 것처럼, 독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다보니까 국가는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어느 누구도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나가서 리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리더십의 부재에요. 

만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라는 리더가 없었다면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다윗과 같은 리더가 없었다면 블레셋의 종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교회될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 · 바울 같은 리더가 리더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이단에 빠지지 않고 순수함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바로 전하고 부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로 세우신 것은 사도가 섬기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지만 섬기지만 동시에 리드하는 역할이에요. 예수님도 리드했어요.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담대히 전하셨어요. 바리새인들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불신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믿음을 명하셨어요. 

하나님의 능력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전능함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해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전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할 수도 있지, 우리가 위축되고 두려워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민망해합니다. 민망해하는 것이 우리 몸에 배었어요. 신앙을 변증하는 것을 변증론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apologetics라고 합니다. 

apologetics라는 말은 apologize, apology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apology는 ‘사과하다’라는 뜻입니다. 미안하다, 민망해하다, 실례를 범했다, 양해를 구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신앙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변증하는 것은 양해를 구하는 차원, ‘내가 이렇게 믿어서 좀 민망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교회를 다닙니다. 이해해 주세요. 양해해 주세요. 제가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주세요.’ 이게 소위 변증하는 방법이에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를 다니며 너희 믿음을 변증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이건 적극적인 것이요, 주도적인 것이요, 그리고 공격적인 것입니다. 이 공격적이라는 말은 어패가 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 역시 적절한 단어의 부재현상입니다. 

우리는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든가 남에게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믿는바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차세계대전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는 작전을 아이젠하워 장군은 Crusade라고 불렀습니다. 

Crusade라는 말은 십자가 전쟁을 부르는 말입니다. 독일군이 지배하고 있던 유럽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십자군 전쟁에 비유해서 Crusade라고 불렀어요. 만일 오늘날 이런 단어를 쓰면 사람들이 반발할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전도 집회를 열 때 그 전도 집회를 Crusade라고 불렀어요. Dallas Crusade, 그 말은 댈러스 전도 집회라는 말이에요. LA Crusade, 그것은 LA 전도 집회라는 말이에요. 

그러나 만일 오늘날 누군가 전도 집회를 Crusade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아우성칠 것입니다. 이슬람권이 아우성칠 것입니다. 중세에 우리를 쳐들어오더니 이제는 복음으로 우리를 쳐들어오려고 하느냐. 그러나 이슬람이 여전히 지하드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별의 별 방법을 통해서 거짓되고 잘못된 것을 퍼뜨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국내의 어느 유명한 이단집단이 기존 교회에 사람들을 잠입시켜서 그들의 이단을 퍼뜨리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추수꾼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 우려하지만 정작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신앙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눈치를 봅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에는 점점 더 거짓말하는 자, 악한 자, 이런 자들의 기세가 등등해지고 바른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요 예수님을 보내셨다면 왜 이 세상에 이슬람이 이렇게 세력을 확장할까?’ 저는 거기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인가? 하나님이 겉으로는 우리에게는 예수 믿으라고 하시면서 배경에서는 이슬람을 키우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더블 플레이를 하고 계시나? 

이단종파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단에 대해서 흥분하고 염려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단에 대해서 그냥 내버려두시는 게 아닐까? 더블 플레이로 교회도 키우고 이단도 키우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중과 뜻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말씀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분위기라든가 세상의 지배적인 문화라든가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만일 마틴 루터가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바른 길 · 바른 신앙 · 바른 교회 · 바른 믿음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의 문화 · 지배적인 분위기 · 인기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기록된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뜻을 다 밝히셨어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나,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것,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무엇을 각오해야 되는지 다 말씀하셨어요. 

만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분명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진지하게 읽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고, 듣기 위해서는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보냄을 받아야 됩니다. 누군가 보내지 않으면 전할 사람이 없고,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고, 듣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셔야 됩니다. 선지자 · 목사 · 교사 · 복음전하는 자 · 사도 ·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하나님이 보내셔서 그들이 전해야 됩니다. 전해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의 선한 의도 자체가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내가 믿어야지, 믿어야지, 의지가 있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듣기 위해서는 누군가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복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에요. 세상 어떤 곳에는 아무리 가 봐도 교회가 보이지 않는 나라도 많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위상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만든 단과 같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보니까 아테네 사람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어 놨는데 제우스도 있을 것이고 아폴로도 있을 것이고 비너스도 있을 것이고 그들이 섬기는 많은 신상들이 있는데 맨 뒤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을 만들어 놨어요. 혹시라도 누구를 빠트려 놨을까봐 거기에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입지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굳이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priority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맨 뒤에 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다른 우상들이 우선권을 차지했지만 오늘날은 그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명예 · 세상의 영광 · 자기의 체면 · 자기의 성공 이런 것이 맨 앞자리에 있고 저 뒤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만든 것처럼 저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나입니다. 이게 반드시 지위가 높고 가진 게 많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의 상대적인 상처 · 자기의 상대적인 불행 · 자신의 상대적인 불만 · 자신의 상대적인 원망 이런 것을 따지고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나라는 존재가 제일 앞에 있는 거예요. 나의 상처 · 나의 염려 · 나의 불행 · 나의 불만 · 나의 문제 · 나의 아픔 · 나의 욕망 이게 제일 앞자리에 있어요. 내가 갖지 못함 · 내가 이루지 못함 · 내가 사랑받지 못함, 나의 고독함 · 외로움 이런 것이 맨 앞에 있어요. ego, 나라는 존재가 제일 중요해요. 그리고 맨 뒤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앙과 교회가 있어요.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나를 돕기 위해서만 유요한 분이지 내가 설마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든가 내가 하나님 나라에 어떤 역할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다른 우상들이 앞자리를 차지했다면 지금은 이 세대, ego라는 것이 중심이 됐어요. 애들도 그렇고 어른도 그렇습니다. 전부다 ‘나’에요. 나! 나! me! me!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주 안에 있는 나,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나의 아픔이든 고독함이든 문제라는 것이 주 안에 있는 나의 존재를 생각할 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게 아니고 그렇게 큰 게 아니고 그렇게 극복할 수 없는 게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나의 착각과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아요. 내 생각을 바꿀 때 나의 아픔이든 나의 불행이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처럼 큰 게 아니었어요. 안개와 같은 것이었어요. 나를 미혹했어요. 나를 혼돈에 빠뜨렸어요. 오랜 세월동안 나를 방황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므로 나를 생각해서는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지만 주 안에 있는 나에게는 그게 근심이 되지 않고 두려움이 변하여 믿음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그게 아니에요. 자기를 과소평가해서 ‘난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뭘, 나는 나서면 안 돼. 나는 조용해야 돼. 나 아니라도 얼마든지 일할 사람이 있어.’ 만일 모세가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가 그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어.’ 아니에요. 내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그렇게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어느 누구도 이 시대에 우연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사명과 책임과 우리 삶의 목적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통해서 얻을 수가 있어요. 인생은 언덕위에 있는 수레바퀴와 같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골짜기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인생이라는 수레바퀴를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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