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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의 때에 의를 배우다 (사 2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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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때에 의를 배우다 (사 26:7-13)


[주님,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의 길을 곧게 트이게 하십니다. 의로우신 주님,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의 길을 평탄하게 하십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께 우리의 희망을 걸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억하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밤에 주님을 사모합니다. 나의 마음이 주님을 간절하게 찾습니다.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실 때에,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비로소 의가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악인에게 은혜를 베푸셔도, 악인들은 옳은 일 하는 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의인들이 사는 땅에 살면서도, 여전히 옳지 않은 일만 합니다. 

주님의 위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심판하시려고 팔을 높이 들어 올리셨으나, 주님의 대적은 그것을 모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시는지를 주님의 대적에게 보여 주셔서, 그들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예비하신 심판의 불로 그들을 없애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성취한 모든 일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까지는 주님 말고 다른 권세자들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기억하겠습니다.]

• 타성적 신앙을 넘어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을 잘 살아내셨습니까? 며칠 전 4세기의 성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글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과 만났습니다. “해는 빛을 뿜어냅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짐승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숨 쉬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물고기들은 강과 바다에서 헤엄을 칩니다. 안 그럴 수가 없어서예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요?”(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단순하게 살기>, 이현주 옮김, 151쪽)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크리소스토무스는 기도, 찬양, 나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늘 듣던 말씀이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를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서도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 신앙은 병이 들었거나, 타성에 젖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일에 떠밀려 뒤뚝 걸음으로 걷다가 문득 멈추어 서면 누군가의 안타까운 시선이 느껴지곤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한시라도 방심하면 세상 풍조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찬송가의 한 대목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나날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든든히 세울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이사야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최대의 시련을 겪던 시기입니다.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B.C.E 745년 즉위)은 근동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소국가들을 삼키고 도성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유배시키는 등 공포정치를 시행했습니다. 사마리아는 굴복했고 유다의 장래는 불투명해졌습니다. 봉신의 예를 갖추기 위해 다마스커스에 갔던 아하스 임금은 앗시리아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방신의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다 설치하도록 하는가 하면(왕하16:10), 예루살렘 성전 집기들을 새로 배열하고 대문 하나를 봉쇄하기도 했습니다. 

나라의 근간이 뒤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참담한 심정으로 아하스에게 나아가 역사를 지배하는 분은 하나님임을 믿으라고 권고했습니다. 예언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심판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남은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그들은 앗시리아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앗시리아의 몰락을 내다봅니다. 누구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때에 이사야는 백성들의 입에서 들려올 노래 소리를 마음으로 듣습니다.

“우리의 성은 견고하다. 주님께서 친히 성벽과 방어벽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26:1)

하나님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들이 사는 견고한 성을 허무십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의 길을 평탄하게 하십니다. 현실은 뒤죽박죽이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질서를 잡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다짐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께 우리의 희망을 걸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억하겠습니다.”(8)

• 어처구니없는 꿈이라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처럼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가로막는 세력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지붕 위의 풀같이 말라 버리고 말 것’(시129:6)입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도 세파에 따라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의의 최후 승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면서도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다시금 돌이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우리는 든든한 삶을 얻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실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의가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옳은 일 하는 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의 힘을 하나님이 어떻게 꺾으시는지를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받지 못하는 이들은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위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10). 심판하려고 높이 들린 하나님의 팔을 보지 못합니다. 눈이 감긴 탓입니다. 지금 우리는 보는 자입니까?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세상의 자원을 축내는 동안 지구촌의 다른 나라가 더욱 가난해지고,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배고픔과 절망에 떠밀려 테러리스트가 되는 현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우리에게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핵 안보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부디 정상들이 핵무기 없는 세상의 꿈을 진지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처구니없게 들리겠지만 저는 이런 광경을 머리에 그려봅니다. 각국의 대표들이 회의를 하기 전에 자리에 앉아 호흡에 집중합니다. 날숨과 들숨에 집중하는 동안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사야 11장 6-9절을 낭독합니다. 영어, 독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 한국어…낭독이 끝날 때마다 잠시 묵상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눕고, 암소와 곰이 벗이 되는 세상의 꿈에 젖어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사야 2장 4절을 읽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고,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는 세상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를 바칩니다. 

저의 상상은 계속됩니다. 조용히 눈을 뜬 대표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어떻게 하면 지구촌에서 굶주리는 이들이 없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여성들이 노동력과 성을 착취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합니다. 마침내 부유한 나라 대표가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한다고 선언하고,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어떤 조건도 없이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말합니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세계 도처에 있는 건강한 시민들이 이미 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악인들은 선한 이들의 연대를 비웃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꿈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씩

악인들은 굳어진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이라는 성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 혹은 겸손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임을 늘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아끼고 존중하고 고마워하며 삽니다. 그런 이들이 늘어날 때 세상은 평화롭게 변합니다. 더디더라도 그 길을 걷는 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철수 화백의 나뭇잎 편지 모음집을 읽다가 깊이 공감되는 글과 만났습니다. 그는 노트 한 귀퉁이에 작은 사다리를 그려놓고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얼마나 오래오래, 얼마나 많이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고 나야 우리들 마음이 한 마음처럼 움직이게 될까요? 욕심 사납고 썩어빠진 영혼들을 어둠 속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순정하고 아름다운 혼들이 나서서 우리들 곁에 밝고 환한 울타리 만들게. 세상살이에 기적이 있을 리 없지만, 한 단계 한 단계씩, 한 걸음 한 걸음씩, 흔들림 없이 위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아가게. 안타까움이 많아서 오히려 조용히 바라보게 됩니다. 부디 한 걸음 나아가게 되기를…속없이 당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무언지도 모르는 우리들.”(이철수,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79쪽) 

우리 마음이 하나 되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힘들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더디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희망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희망이기도 합니다. 

• ‘아니오’와 ‘예’의 변증법

그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들,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까지는 주님 말고 다른 권세자들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기억하겠습니다.”(13)

여기서 말하는 권세자들은 다른 신들을 일컫는 말이기보다는 왕이나 이방의 군왕들을 지칭하는 말일 겁니다. 좋은 세상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해낼 거라고 혹은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백성들의 복입니다. 나쁜 지도자를 만나면 역사가 퇴행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나쁜 권세자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딱지를 붙여 ‘우리’와 ‘그들’을 나눕니다. 편을 가르고,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편 가르기가 일상화된 세상은 안식이 없는 세상입니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자 사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습니다. 말들이 거칠어집니다. 

이런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름답고 온전한 세상은 세상의 권세자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돌릴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요한은 그 비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계21:2)

역사를 새롭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손을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한 세상과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불의에 대해 ‘아니오’ 하지 않는 사람은 불의의 공모자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완성할 힘은 사람에게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을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파괴와 죽음의 세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처럼 악의 뿌리는 선의 뿌리와 뒤엉켜 있습니다. 쉬운 해결책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며 의를 배울 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생명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고, 낙심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배우 차인표 씨가 T.V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지하지만 유쾌하고, 참으로 기독교적이지만 티를 내지 않고, 헌신적이지만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강박하지 않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가능성을 본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요?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의 세력에 대해 ‘아니오’ 하는 동시에 생명과 평화의 징조를 향해 ‘예’ 함으로써 우리 삶이 주님의 생명과 하나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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