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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집 (요 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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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집 (요 5:1-16)


사람은 살면서 맑은 날과 비 오는 날, 따뜻한 날과 추운 날을 지냅니다. 또한 기쁠 때와 슬플 때, 잘될 때와 안 될 때, 살 때와 죽을 때를 겪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이러한 시간들이 수없이 머물렀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이 결국에는 내게 유익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고, 절망적인 문제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어 좋은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제재소에서 일하던 40세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루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신은 해고되었소."
소장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당시는 극심한 불경기였고, 그가 받던 적은 돈은 그나마 가정의 생계를 꾸려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심각한 고민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만큼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 왔는데, 제재소 사장이 자신을 이렇게 대우하다니 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고민하며 생각해 온 계획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그 동안 내내 생각해 봤는데,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우리 집을 저당 잡히는 거요. 그리고 난 건축 사업을 시작하리다."
처음에 그의 아내는 펄쩍 뛰며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는 할 수 없이 그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첫 모험은 두 개의 작은 건축물을 짓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건축 사업을 시작하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는 수백만 달러의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가 바로 수많은 홀리데이 인 호텔들을 건축한 윌리스 존슨입니다.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옛날 제재소에서 나를 해고한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할 거요. 그때 나는 왜 내가 해고당해야 했는지 알지 못했죠. 그러나 그때의 아픔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음을 그 후에야 알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엮어 가는 삶의 모든 조각들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이루어 냅니다. 영광과 기쁨의 조각뿐만 아니라 고난과 아픔의 조각까지도 우리 인생의 작품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로마서 8:28은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 조각들을 합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시는 하나님.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무엇이든지요!"

우리가 기억할 것은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의 빛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의 북동쪽에 양문이라고 하는 성문이 있습니다. 그 바로 안쪽에 베데스다라 불리는 못이 하나 있고 옆에 행각 다섯이 있어 거기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 못가에 각종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이 못의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못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슬픈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이 못가로 오지만 언제 물이 움직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나마 물이 움직인다고 해도 병에서 나음 받는 사람은 단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도 병이겠지만 병에서 고침 받을 희망이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이 있다면 의사를 먼저 찾아갔겠죠. 약을 처방 받아 먹기도 하겠죠. 그렇게 해서 나을 수 있다고 할 때 누군들 의사를 찾지 않겠으며 약을 먹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그나마도 할 수가 없습니다.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나마 돈이 있어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베데스다 못가로 모여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물이 움직이고 난 다음에는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하니 사람들이 거기로 모여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얼마 후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일 먼저 찾으신 곳이 바로 이 베데스다 못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관심은 가진 사람은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서른여덟 해나 병을 앓아온 사람, 당장 죽을병은 아니었기에 서른여덟 해를 병을 앓아오지 않았겠습니까? 늘 아구구구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을 것입니다. 어찌 그 사람뿐이었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는 가족들은 또 어땠겠습니까? 

처음에는 고쳐보려고 애를 썼겠죠. 어쩌면 그 사람 때문에 집안이 아주 몰락했을 수도 있습니다. 돈은 돈대로 들이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여전히 병에서 놓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결국에는 그 사람 스스로가 집을 떠났든 아니면 누가 데려다 주었든 이 사람이 지금 베데스다 못가 행각에 누워 있습니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너무도 외롭고 쓸쓸하게 누워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답니다. 그렇다고 다른 병자가 도와주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병자를 돕는 사람이 이 병자를 돕겠습니까? 이건 경쟁입니다. 누가 먼저 못에 들어가느냐 하는 경쟁입니다. 먼저 들어가야 나을 수가 있습니다. 나으려고 여기 온 사람들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사람들이 여기 무슨 체면이 있습니까? 아니면 장유유서가 있습니까? 

그저 먼저 들어가면 됩니다. 늦은 사람은 서운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이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누가 됐든 무슨 병에 걸렸든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베데스다라는 이름처럼이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먼저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로서는 절망입니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무슨 번호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비를 뽑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것이 유일한 법입니다. 그러니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입장에서 못에 먼저 들어가 보겠노라 기다시피 가보지만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묻는 예수님이나 대답하는 그 사람이나 참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무슨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듯싶습니다. 아니 낫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여기 은혜의 집 베데스다 못가에 와서 누워 있겠습니까? 낫고 싶으니까 왔겠죠? 거기다 대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다시 말해서 “너 낫고 싶어?” 라고 묻는다면 거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입니까? 거기에 대답하는 이 사람도 보십시오. 한 마디로 말하면 “낫고야 싶죠. 낫고 싶으니 물이 움직일 때 못으로 가보지만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하나 없어 결국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곤 하네요.” 어찌 보면 신세 한탄과 같은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는 절망입니다. 도무지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누가 양보할 사람이 있겠어요? 매일 같이 라도 물이 움직인다면 그래서 하루에 한 명씩 매일 고침을 받는다면야 선착순으로 번호표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1년에 한 번일 수도 있고 더 오랫동안 아무 소식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이제나 저제나 하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모여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벌써 절망하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여전히 소망의 끈을 붙들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으리라. 어찌 보면 가망성 없는 이야기일망정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을망정 미련이라고 해도 좋다는 겁니다. 어찌됐든 다음번엔 내가 먼저 들어갈 수 있다는 그 한 가지 희망만은 포기하지 않은 이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에 있습니다. 어찌 보면 벌써 절망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또 이 사람이 아무 것도 안 하고 단지 희망만 붙들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내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이 사람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지 노력하여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셨던 것은 바로 이 사람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자살이 왜 가장 큰 죄인가 하면 그로서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요 그 기회를 스스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한 사람은 아무리 과거가 화려하다고 해도 그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안 되는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그들의 출애굽 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부 하나님이 하셨지 않습니까? 물이 없을 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매일 새벽 내려주셔서 그들로 먹거리 걱정 없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 메추리기를 질리도록 먹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앞서서 인도하셨습니다. 아말렉 사람도 물리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나안 사람들이 강해 보여도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고 나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아낙 자손을 보는 순간 그들의 마음이 녹아 버렸습니다. 마음에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원망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서른여덟 해 동안 병을 앓아온 이 사람을 베데스다 못가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의 형편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통해 새로운 빛을 찾는 우리 모두가 되심으로 감옥 생활이 찬송 생활로 바뀌고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기억할 것은 우리를 찾아주신 주님 안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이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곧 바로 예수님이 그 사람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고 해도 될 터인데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더 이상 네가 병에 매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자로 누워있던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은 더 이상 너는 병자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병자로서의 흔적도 다 없애버리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나타납니까?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와서 고쳐달라며 예수님을 찾아온 왕의 신하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믿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아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믿음, 믿고 갔던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을 살렸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고침 받았습니다. 
그 예수님이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온 이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가버나움에서 온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역사를 하실 수 있는지를 이미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믿고 갈 수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 베데스다 못가의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예수님 역시 이 병자를 전에 만났던 적이 없습니다. 처음입니다. 그런데도 그 많은 병자를 놓아두고 이 병자를 찾아 만나십니다. 그리고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는 “그렇습니다. 낫기를 원합니다.”고 대답하는 말을 듣자마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병자의 삶에서 건강한 삶으로, 세상의 말을 듣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고 나오지를 않습니까? 
“이보시오 오늘이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당당합니다. 

“나를 낫게 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하면서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분명 이 사람도 압니다. 안식일의 규례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에는 어떠한 물건도 나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리를 들고 걸어간다는 것은 물건을 나르는 것과 같아서 시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것보다 자기를 낫게 한 이분이 누구인지를 몰라도 말씀 한 마디로 그 지긋지긋했던 38년 동안이나 자기를 괴롭혔던 이 병을 고쳐주신 분이라면 그분의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고 이 사람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예수님이 다시 이 사람을 만나서 이르십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러니까 네가 병에서 나은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았다고 하지만 다시 죄를 범하면 더 심한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결코 꾸짖지 아니하신다”고 하십니다. 
야고보서 5:13~15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또한 마가복음 16:17~18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 말씀들을 따라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먼저 주님이 나를 찾아주셨음을 믿으십시오. 수많은 사람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주시고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서른여덟 해 앓았던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랐기에 다시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갔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압니다. 주님의 택하시고 불러주셔서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특별한 소유로 삼아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혼자서 미적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따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주저앉아만 있으려고 하십니까? 나는 이렇고 너는 저렇다고 말만 하고 주저앉아 있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어가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찾아와 만나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한번 주님을 깨닫고 끝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라도 주님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에 매여 있습니까? 절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질병과 모든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고 가는 것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믿고 기도하는 성도들이요 부르짖어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연에는 고유의 향기가 있습니다. 대지의 흙내음과 꽃들의 달콤한 향취, 풀잎의 싱그러움이 자연 속에 어우러져 아름다운 향내를 발합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여러 향기를 맡고 삽니다. 잠시의 여유를 즐길 때에 마시는 차의 특유의 향이나, 정성스레 준비된 식탁에서 풍겨 나오는 따스한 음식 내음 등이 그것입니다.
사람 역시 삶의 과정에서 향기를 발합니다. 인격과 신앙의 향기를……. 사람이 지닌 이러한 향기는 아무 일 없이 평탄할 때에는 잘 풍겨 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평상시에는 어느 누가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지녔는지 쉽게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지닌 향기가 발산됩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오해와 비난 속에서 나타나는 향기가 그 사람의 참된 향기인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에게서는 고난의 때에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납니다. 뜻밖의 고난으로 아픔의 밤을 지나면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심치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침내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성도에게서는 오히려 고난의 때에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가 발산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향수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곳에서는 좋은 향수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한밤중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밤12시에 장미를 따기 시작해서 2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한밤중 짧은 시간 내에 장미를 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장미가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한다는 실험결과 때문입니다. 햇볕이 따뜻한 낮에는 장미의 향기가 40퍼센트 정도나 감소됩니다. 하지만 햇볕도 없고 공기도 차가운 밤에, 모든 식물이 활동을 멈추고 움츠러드는 그때에 장미는 오히려 가장 깊은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극심한 고난을 통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여러분에게선 이전에 알 수 없던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 나게 됩니다. 비록 몸에 향수가 없어도 여러분 곁의 사람들은 여러분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믿음의 향내를 맡게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힘들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서른여덟 해가 있었기에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절망하지 않고 베데스다에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베데스다는 그 뜻처럼 은혜의 집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이 바로 이 베데스다 은혜의 집입니다. 예수님의 품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아래 우리는 언제든지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는 여기에 더하여 이제부터는 세상의 법을 따라 사는 우리가 아니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길은 오직 하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지 마시고 오직 말씀대로 사십시오. 내 생각대로가 아닌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사십시오. 
참 사랑의 실천자가 되십시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신 히브리서 10장 24~25의 말씀대로 서로 돌아보십시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십시오.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에 머물다 주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된 서른여덟 해 앓던 이 사람처럼 항상 주의 전 은혜의 집을 찾아 은혜 아래 머무심으로 언제나 하늘 영광을 보며 모든 하늘 은총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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