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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히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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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어느 교회 사택에 도적이 들었습니다. 잠자던 목사님이 도적의 침입에 놀라 일어나 손을 들었습니다. 도적이 낮게 말했습니다. "손을 들고 꼼짝하지 말어!" 목사님은 손을 들고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순순히 말할 때 있는 것 다 내놔!" "가진 것은 보시는 바이고, 돈은 없습니다." 칼을 들고 위협하던 도적이 두리번거리며 살폈습니다. "목사 집이 왜 이렇게 가난해?" 투덜거리며 도적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손들고 있는 것이 안쓰러운지, 도적은 "손 내리고 앉은 채로 차렷!"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꼼짝 않고 손을 내리고 차렷 자세로 있었습니다. 도적은 목사의 호주머니를 뒤져 보기도 하고 서랍을 열기도 하고 곳곳을 찾아 봐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 실망한 듯 나가면서 이렇게 말을 던졌답니다. "나를 위해 좀 모아 놓고 사시오!" 도적이 떠나고 난 후 목사님은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회개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는 오늘 밤 도적에게 꼼짝 못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주여, 평상시 내가 도적에게 순종한 만큼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순종은 복의 근원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케 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제사보다 더 좋아하십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자들은 제사도, 많은 헌금도 필요하나 더욱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뜻에 순복해야 합니다. 많은 핍박과 조롱 속에서도 자신의 안일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앙 고백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과 함께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표본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지상에 오시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시기 까지 순종 하셨습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세상의 어떤 왕보다 더 뛰어나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배고픔과 배신, 고독과 이별의 슬픔 등을 고루 맛보셨다는 사실은 순종과 겸손의 참된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신 주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효성과 순종으로 받드시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눅 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30여 년간 부모의 보호와 권위 아래 순종하며 받들어 모셨습니다.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것은 질서정연한 가정의 훈련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이 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작은 소망을 갖는 즐거움과 순수한 애정의 높은 가치를 배우는 곳도 가정이며, 모든 도덕적 미적 안목과 순결을 유지하는 가장 튼튼한 안전장치가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가정에서 근면하게 생활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그 자신도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은 후에 그의 모친과 여러 동생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또한 육체적 인간으로 계시는 날 동안, 제사장이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선물과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언약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의 기도를 드리며 순종하셨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의 이러한 간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땀 흘리며 부르짖으셨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울부짖는 소리는 고통의 최절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목전에 두고도, 자신의 고통이 엄청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 순종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심으로 순종의 자리에 나아가셨습니다.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온 백성의 죄를 위한 속제물로 단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서 순종하기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요? 성경읽기? 기도? 전도? 예배? 봉사? 헌금? 이러한 일들도 힘들기는 하지만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하지 않다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하기 힘들고 어렵고, 아니 죽기보다 하기 싫은 것은 다름 아닌 용서라 합니다. 

용서는 본능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당한 것 이상으로 앙갚음하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 라멕의 삶의 원리로 그는 사람을 죽이고서도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자는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용서는 도덕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도덕은 권선징악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도덕은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용서는 하나님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런 대 사역을 이룬 적이 없었고 이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놀라운 그리스도의 업적이 '순종'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고 그분을 영접하는 자만이 그분이 순종을 통해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얻는 생명, 곧 구원의 효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대제사장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오로지 순종  함으로 자기 백성들의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전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지니셨으며 대속 사역을 통해 대제사장직에 앉으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경우처럼 하나님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셨으나 그리스도는 아론과 같은 레위자손으로서의 제사장의 위치에서 임명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적인 권위와 권세를 가진 위치에서 임명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통해 자기 백성들의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일시적인 속죄를 가능케 하는 아론의 제사장직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의 가문이 아니라, 다윗 왕(유다)의 가문이셨기 때문에 아론의 레위기적인 대제사장의 뒤를 잇지 않고, 살렘의 왕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창 14:18)의 뒤를 잇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아론과 비교될 수 없는 독특성과 탁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된 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대제사장과 다른 탁월성을 지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 탁월성은 손종함으로 결론 맺음을 보게 됩니다.

죄악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제사장이며 속죄물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대제사장도 감당하지 못했던 일을 하셨습니다. 
참된 목자, 참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대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희생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셨습니다. 

(히 2:9-10)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요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모든 사역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으로 속죄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을 하나님께 받으시고, 더 나아가 구주로 계시며 영광 돌리고 계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럴듯한 겉포장일 뿐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하여 내가 더 높이 올라가려 하지는 않았는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직임을 손종함으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 된 우리도 역시 그를 따라 손종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패를 우리 심장에 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의 모습은 오늘 그리스도인을 향한 순종의 모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난을 받기까지 행한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러한 온전한 순종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신뢰케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순종을 보이고 있는가요?
외적인 봉사만으로 그 순종을 다 했다고 자랑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한 번은 레오날드 우드(Leonard Wood) 경이 프랑스 왕을 방문했습니다. 왕은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므로 다음 날 만찬에 초대한다는 기별을 보냈습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 날 궁전으로 갔고, 한 홀에서 왕을 만났습니다. 프랑스 왕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갑게 그를 맞으며 말했습니다. "레오날드 경, 나는 이곳에서 당신을 보게 되리라고는 정말 기대도 못했소. 어떻게 된 일이오?" 그러자 레오날드 경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폐하께서 저를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소. 하지만 경은 나의 초대에 아무런 응답도 보내지 않았소." 비로소 사태를 이해한 레오날드 우드 경은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왕의 초대에는 결코 가타부타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순종만 있을 뿐이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고 합니다
  
예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십자가 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순종의 모습을 여기서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주간입니다. 우리는 이 주간을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서 있는가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 위가 아닌, 자신의 영광을 따라 올라서고 있지는 않는가요?

오늘 우리의 참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시 낮추어야 하고 그 낮아짐의 현장에서 순종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 주간을 앞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100%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10퍼센트 순종하면 10퍼센트의 행복을, 50퍼센트 순종하면 50퍼센트의 행복을, 100퍼센트 순종하면 100퍼센트의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샘 슈메이커)라고 하가도 합니다.

우리에게 불리하거나 손해가 될 성 싶으면 순종하지 않고 유리하면 순종 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이런 변명,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자꾸 순종하기를 지체하면 그것도 순종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연된 순종은 불순종의 동생이다."

순종이라는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하고도 완전한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하나님은 그런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순종의 사역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의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구원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이 같은 원리는 성도 개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도 한 사람의 순종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순종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과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조롱을 받으신 것처럼 남들의 비웃음과 조롱이 있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필경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가져왔듯이 우리의 순종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만을 두려워하는 순종을 통해 보다 많은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인정과 더욱 놀라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였던 스펄젼 목사님이 하루는 자신이 돌보는 고아들을 위해 한 도시에서 3백파운드의 금화를 모금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해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그 돈을 조지 뮐러 목사에게 갖다 주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스펄젼은 자신이 돌보는 고아들에게 급하게 필요한 돈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성령이 조지 뮐러 목사에게 그 돈을 갖다 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굉장한 믿음의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지금 그 돈이 필요한데 겨우 그 돈을 모았는데 어떻게 갖다 주느냐?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뮐러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뮐러 목사님을 찾아가니 마침 기도실에서 뮐러 목사님이 나왔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3백 파운드를 내밀며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백 파운드를 목사님께 드리라고 하셔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하고 내놓으니까 뮐러 목사님은 스펄젼 목사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긴급하게 필요하니 3백 파운드를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지 뮐러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스펄젼 목사님이 모은 돈 3백 파운드를 주라고 할 때 그는 담대한 믿음으로 순종해서 자기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내놓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뮐러 목사님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상 위에 웬 봉투가 하나 놓여져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315파운드의 헌금이 들어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감격했습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주여! 주님께서 뮐러 목사에게 3백 파운드 주라고 해서 제가 뮐러 목사에게 주었는데 주님께서 이자까지 보태어가지고서 315파운드를 보내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순종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조지 뮐러 목사님이 감동하고 결국도 스펄젼 목사님 자신도 감동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즉각적인 순종은 하나님을 크게 감동시키시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되시기 까지 순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순종하시고 하나님 영광 위해 순종하신 모습에서 우리의 순종의 모습을 찾아보고 순종하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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