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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 왕하 5: 1-14, 막 1:40-45, 고전 9: 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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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 왕하 5: 1-14, 막 1:40-45, 고전 9: 24-27)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은 피부가 썩어문드러지는 무서운 병이지요. 한밤중에 잠을 자는 동안 쥐가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물어가도 모릅니다. 그만큼 치명적인 병입니다. 불치병입니다.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가족과 마을로부터 격리됩니다. 나병의 제일 큰 문제는 공민권이 박탈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사회적 죽음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종종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환자들이 육신의 질고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관계성을 회복한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게 되고, 가족을 비롯한 이웃과도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이지요. 이처럼 나병환자의 치유에는 사회적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주로 구약성경의 열왕기하 5: 1-14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병에 걸리고 또 병을 치료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날 대가 많습니다.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과 마음에 병이 오고 감을 아무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방의학'이라고 해서 음식을 가려먹고 적당한 운동을 해서 많은 성인병을 미리 막을 수는 있지만 언제 어떻게 어떤 질병에 걸리게 될지는 우리의 힘으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치유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다 고침 받고 싶지만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병에 걸리고 고침 받는 것 모두가 우리의 통제범위를 벗어나는 이유는 우리의 신체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복잡하고 정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할 때 똑같은 질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똑같은 치료를 제공한다고 해도 환자들의 반응은 천차만별로 서로 달라서 어떤 사람은 쉽게 낫고 또 어떤 사람은 쉽게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치유의 과정 역시 환자 자신은 물론이고 의사들도 거의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을 때가 많다고 합니다. 

제가 어떤 책을 읽어보니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워싱턴이 목이 아팠을 때 그의 치료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밀(molasses)에다가 양파를 끓여서 마셨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살던 18세기에 영국 의사들은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충치가 먹은 부분에다가 무당벌레(ladybugs)를 짓이겨 넣어서 치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 현대인의 의학상식으로 볼 때에는 황당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방법들이 아주 효과적으로 잘 먹혀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 환자 자신의 의사나 약품에 대한 태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의 본문을 통하여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렸다가 어떻게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함께 고침을 받아서 전인치유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일어나는 치유 사건>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나아만이 나병을 고침 받은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물론 우리의 심신에 걸린 병을 고쳐주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사람들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려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셨지만, 그의 치유 사건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첫째로, 나아만 장군의 치유는 전혀 뜻하지 않게 찾아왔습니다. 

먼저 나아만이 어떤 사람입니까? 1절을 보니까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를 한 몸에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임금님 다음으로 권세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이지요. 그 당시 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린 것입니다. 자기 몸이 썩어문드러져 갈 뿐 아니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무서운 병이지요. 그래서 1절 후반부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우리가 돈이 있으면 뭐 합니까? 권력과 명예가 높으면 뭐합니까? 나병에 걸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처지가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와 같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건강해서 멀쩡해도 우리의 영혼이 죄에 찌들려 사망 권세에 붙들려 있다면 우리야말로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와 같은 운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처지에 빠져있던 나아만 장군이 치유를 받은 것은 전혀 엉뚱한 사람을 통해서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내를 위해 시중들던 이스라엘 포로 출신의 소녀가 흘린 말을 듣고서는 치유 받을 길이 열렸습니다. 2-3절을 보세요.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노예로 잡아온 소녀 하나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참 좋겠는데." 자기 나라 이스라엘의 선지자 앞에 가면 혹시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지요.

여기 나아만 장군과 포로로 잡혀온 계집아이를 비교해 보세요. 나아만 장군은 아람, 즉 시리아의 왕 다음으로 실권을 가진 국방장관으로서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이 여자아이는 포로로 잡혀와 주인마님의 시중을 드는 이름조차도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아주 미천한 여종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계집종의 말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지만 자기의 병을 고쳐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겸손히 듣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조건 들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나아만 장군에게 치유의 길을 열어준 사람은 포로 출신의 여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에 가겠다는 뜻을 왕에게 전달하자 아람왕은 친히 이스라엘 왕에 편지를 써주고 또 수많은 선물도 함께 보냈습니다. 이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속담처럼 갑자기 나아만 일행이 수많은 사절단과 선물들을 잔뜩 안고서는 이스라엘 왕에게 찾아와 왕의 친필까지 전하자 이스라엘 왕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틀림없이 뭔가 계락을 꾸며서 이스라엘을 공격해 올 것으로 알고 공포에 질려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개 포로로 잡혀온 무명의 이스라엘 계집 아이 하나가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 즉 나아만은 물론이고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까지 뒤흔들어 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이 소녀로 하여금 당대 최고의 권세자들을 일대 소동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선지자 엘리사에 대한 불굴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예기치 않게 포로 소녀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지요! 

이제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고 공포에 떤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나아만 장군 일행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었던지 8절 후반부에 보면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나아만의 계집종과 엘리사에게 이런 위대한 확신을 갖도록 했습니다. 드디어 나아만 장군 일행이 말들과 병거들과 사절단을 잔뜩 이끌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둘째로, 나아만 장군의 치유는 자기의 처지를 직시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당도했을 때 큰 기대를 건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지요. 이스라엘보다도 훨씬 더 힘이 센 아람 나라의 제 2인자가 병을 고치자고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다면 당연히 엘리사가 버선발로 직접 뛰어나와 "저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상처 부위에 안수하면서"(11절) 자기의 문둥병을 고쳐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종 하나를 달랑 내보내어서 "요단강에 가서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 목욕을 하라"(10절)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아만 장군이 종들을 데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자기 나라에 흐르는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보다 낫지 않은가? 차라리 내가 거기서 몸을 씻는 것이 낫지 이 더러운 흙탕물이 흐르는 요단강에 갈까보냐!"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나아만의 종들이 주인을 만류했습니다. 13절에 보면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이 보다 더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라도 당신은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면서 나아만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병 고치는 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아람의 국방장관이라고 할지라도 현재는 나병환자입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지금은 치유가 필요한 환자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가 있습니까? 내 영혼에 나병이 걸려 죄로 인해 죽어간다면 세상의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나병에 걸린 내 처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치유 받아야 합니다. 영혼의 질병을 고침 받고 구원받으려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의 종들은 지금 나아만은 깨끗이 치료받아야 할 나병 환자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현실'을 지적해 줍니다. 확실히 나아만은 좋은 종들을 거느린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이 치유를 얻기까지 성경에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은, 미천하지만 현명한 종들의 역할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 1: 27절의 말씀처럼 확실히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지난 번 부흥회 때 많은 교인들이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어느 때의 부흥회보다도 헌금도 많이 나왔습니다. 일곱 번의 집회가 있는 동안 은혜를 받아 마음의 문이 열리니까 예기치 않았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살림이 어려울 터인데 매 시간마다 정성을 다해 예물을 바쳤습니다. 어떤 분은 금 열 돈을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시부모님이 손자 학비로 준 장학금 전액을 바친 분도 있습니다. 전세비로 한 푼 두 푼 모아둔, 소중한 종자돈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린 분도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보통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제 주목할 것은 나아만 장군이 종들의 말을 듣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metanoia'인데 "∼으로부터 돌아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가 해오던 습관과 죄악을 툴툴 벗어 던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되돌아서는 '실천'으로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회개했다고 하는 것은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격분해서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 겸손한 마음으로 흙탕물이 넘실대는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씩이나 몸을 담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셋째로, 나아만 장군의 치유는 믿음과 순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한 두 번 도 아니고 작은 강, 흙탕물 강인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을 씻었다는 것이지요. 14절을 보세요.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모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회개했습니다.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인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권세로도 억만금을 주어도 고칠 수 없었던 나병이 깨끗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작은 강, 흙탕물이 넘실대는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할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수많은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미친 짓 하는 것은 아닐까? 요단강에 몸을 담가 병이 나을 것이라면 한두 번 하면 효과가 나타나야지 일곱 번씩이나 할게 무어람! 불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아만 장군은 순종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시키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지요. 엿새 동안 여리고 성 주변을 한 바퀴씩 돌았고, 일곱 째 날에는 일곱 번 돌았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터무니없는 명령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완전무장하여 총공격을 해도 여리고 성이 무너질까 말까인데 일주일 동안 그냥 돌기만 하라니, 순종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6일 동안 뺑글뺑글 돌아도 무너질 어떤 조짐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마음속에 의구심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어떤 가능성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조건 6일 동안 한 바퀴씩 돌았고, 제 7일에는 일곱 바퀴를 다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나아만 장군도 세상에서 자랑하던 모든 것을 겸손히 내려놓고 순종했을 때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자기가 정한 기준과 세상이 정한 기준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준을 따라 겸손히 순종했더니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치유가 필요한 환자입니다. 육신이 멀쩡하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병이 들었습니다. 죄로 인해 치명적인 나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치유가 필요한 환자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치유의 손길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옵니다. 우리의 기대와 기준을 뛰어넘은 곳에서 옵니다.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겸손히 우리의 세상 자랑을 내려놓읍시다. 겸손히 주님의 은혜만 구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합시다. 그리라면 오늘도 나아만 장군의 기적이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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