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눅 23:44-56)

첨부 1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눅 23:44-56)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도 이겨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 감격함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고난주일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하여야 하는 지에 대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먼저, 439장 찬송가의 1절과 3절 가사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십자가로 가까이 가게 하시옵고 몸소 받은 고생도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무한 영광입니까? 더욱이 요단강을 건넌 후 즉 죽은 후에 영광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I. 영향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이전에 먼저 전 우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44절 말씀은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오전 아홉시쯤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어둠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어둠은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에 참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자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실 때, 태양은 잠시나마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늘이 울고 땅이 우는 우주적 사건이었습니다.

1. 자연에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온 땅에 임한 어둠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임한 어둠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되어야 할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 세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으로 모든 피조물이 함께 기뻐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감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처럼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구원받은 우리가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45절 말씀은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고 하였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태양도 빛을 잃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두 폭으로 갈라졌습니다. 여기에서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친 휘장입니다.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이라도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죄인이 감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의 담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인간의 죄가 해결되었습니다. 


2. 속죄에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여 주셔서 하나님께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넓게 우주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가장 깊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통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각각 회복되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십자가이건만 십자가를 대하는 사람들의 그 반응은 제 각각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II. 반응 

먼저, 십자가를 지신 당사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지신 십자가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의 내용입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말씀을 쏟아내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탁하다[parativqhmi/파라티데미]’는 것은 어원적으로는 ‘음식 같은 것을 사람의 옆이나 앞에 놓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곁에 있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당사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영혼을 간곡하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맡겨드렸습니다.

1. 처절한 맡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몸과 영혼도 하나님께 부탁하고 말씀만 따라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래 전에, 어느 부부가 겪은 이야기랍니다. 그 부부가 어디를 다녀오다가 공중목욕탕에 갔습니다. 남편은 남탕으로 들어갔고, 아내는 여탕으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목욕을 마친 남편이 밖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내가 나오지를 않더랍니다. 초조해진 남편이 직원에게 부탁해서 아내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내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군가 아내의 옷장을 열고 그 안에 있던 시계와 카메라 그리고 화장품까지 모두 훔쳐갔습니다. 값으로 치자면 그리 비싼 것들은 아니었지만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주인에게 항의하면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주인은 태연스레 그 부부의 요구를 거절하며 오히려 부부의 부주의를 나무랐습니다.
“이 보시요! 저기 매표구 위에 붙어 있는 글이 안보이십니까? 가서 좀 자세히 읽어보세요!”

무슨 말인가 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상법 제 153조 : 화폐, 유가 증권, 기타 고가품에 대하여 객이 그 종류와 가액을 명시하여 임치하지 아니하면 공중접객업자는 그 물건의 멸실, 또는 훼손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없다.”

당황해 하는 이 부부에게 주인은 단호하게 “주인에게 맡기지 않은 귀중품은 책임지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우리의 귀중품을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내가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시간, 내 지식, 내 재능, 내 생명, 내 가족, 내 직장! 내가 붙들고 있지 않으면 한 순간에 날아갈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책임적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특히 영혼의 문제는 우리 자신이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길 때 진정으로 책임질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맡겨드림으로 얻는 영혼의 자유와 평안함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보는 반응은 바로 그 때 거기에서 그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던 백부장의 반응입니다.

47절 말씀입니다.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여기에서 백부장은 로마 군인 백 명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그는 이번 십자가의 처형을 관할하였던 현장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의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된 일’이란 세 시간에 걸쳐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덮인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는 온 몸으로 경험하여 그 보고 들은 것에 의하여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진실한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작은 뇌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중 하나는 왜 유독 백부장만이 그 된 일을 보았을까하는 것입니다. 일, 이십 분도 아니고 세 시간씩이나 해가 빛을 잃었다면, 바로 그 순간 일식 현상과 같은 것이라도 일어나서 온 세상이 캄캄하였다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보고 느낀 것을 대표적으로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고백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로마 군인 백부장이, 그 사건의 현장 책임자인 자신의 입을 통하여 차마 할 수 없는 고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총독의 명령에 따라서 능숙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행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비록 총독의 명령에 따라서 십자가형을 집행했지만 예수님은 사형을 당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증인의 자세입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귀찮다고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르는 불이익을 걱정하여 진실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증인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삶의 진실한 고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용감하게 진실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 주의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거기에 구경하러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그야말로 구경하려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의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끔찍하게 처형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고백할 지식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마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3. 양심의 찔림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양심의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22-36에서 발췌)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물었습니다(행 2:37).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습니다(행 2:41).

그러나 모든 사람이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양심이 찔린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행7:54). 그리고 그들은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행 7:59). 

이 시대는 양심이 화인 맞는 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양심이 무디어졌습니다. 여간해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여간해서는 감동하지 않습니다. 여간해서는 움직이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용기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49절 말씀입니다.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 로마 군인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구경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닌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습니다. 왜 그들은 멀찍이서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망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는 두려워하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로마 군인들 때문에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떠나기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컸습니다. 그들은 다만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멀리 서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그저 지켜보아야 만 했습니다.

4. 두려운 관망이 있습니다.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애매한 입장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야말로 굴뚝처럼 높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 고민을 끝내야 합니다. 계속 망설이다가는 결국 우리를 위해 예비 된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결단할 수 있는 용기가 저에게 또한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참으로 다양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의외의 반응도 있습니다.

거기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의회 의원이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는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에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52절과 53절 말씀입니다.
: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가는 베로 싼 다음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다가 모셨습니다. 그는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막 15:43).

5. 당돌한 헌신이 있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니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성령님의 감동입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는 주님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왼쪽에 앉을지 오른쪽에 앉을지를 다투던 제자들은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힘없는 여인들이 그래도 예수님에게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곳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공회 의원인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자진하여 나섰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을 감수하고 당돌하게 나섰습니다. 전혀 의외의 사람이 쏟은 헌신을 통하여 예수님의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하나님은 생각 밖의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희생도 각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반응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여전히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예배당을 상징하는 상징물로만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려서 증오심을 가지고 십자가에 대항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치장을 위하여 단지 액세서리의 하나로 여기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십자가의 의미는 천양지차입니다. 십자가 앞에 섰던 백부장처럼 진솔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 주위에 있던 구경꾼들처럼 단지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알았지만 십자가에서 떨어져 있던 사람들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냥 어정쩡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당돌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백부장처럼? 구경꾼들처럼? 예수님을 알던 자들처럼? 아리마대 요셉처럼? 아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를 지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