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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으로 가는 길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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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으로 가는 길 (마 26:36-46)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노릇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애굽에서 나온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광야는 마실 물도 먹을 것도 부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우리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는 고기 가마 곁에 앉아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었었는데 이제는 광야로 나와 굶어 죽게 되었다’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양식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하얀 결정체로 꿀 과자 같은 맛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사람이 하루의 먹을 분량으로 만나를 ‘한 오멜’씩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오멜’은 2리터를 말합니다. 만약에 욕심을 내어 한 오멜 이상을 거두면 썩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이틀 분의 양을 거둬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아침에 만나를 거두는데 얼마만큼의 만나를 주워 오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한 오멜을 거둬 오겠습니까? 아니면 더 많은 양을 거둬 와서 쌓아 두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해서 아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 오멜 보다 훨씬 많이 거둬왔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혹시 내일 만나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에 더 많이 거둬왔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면 남은 만나는 어김없이 벌레가 생기고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모세는 노를 발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하루 식량의 분량으로 한 오멜을 정하셨을까? 그냥 만나를 내려 주시고 백성들이 거두고 싶은 만큼 거두도록 내버려 두시면 썩거나 만약 썩지 않아도 더 신선한 것을 먹기 위해 더 거둬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괜히 상황을 어렵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율을 정하시는 데는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의 관심은 만나의 맛이 어떤가, 어떻게 생겼는가, 얼마나 많이 거둘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는가, 불순종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하루에 한 오멜을 거두고 안식일에는 두 배로 십 오멜을 거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제하거나 까다로움을 피우기 위해 일부러 만드신 법이 아닙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보시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 믿음의 땅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불신은 불순종입니다.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 내가 당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모순이고 위선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와서 그의 마음에 불신의 씨앗을 뿌려 놓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믿음이 깨어집니다. 불신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들은 에덴에서 추방당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그 나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는 것은 사단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착각하는 아담과 하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 순종입니다. 그 순종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불순종했을 때 ‘나는 제사 보다 순종을 원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더 풍성한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고 변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어떤 제사보다도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회복은 제사와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를 다시 에덴으로 즉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기 위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호산나를 외치며 ‘우리를 구원하실 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왕이 되기를 기대하고 소리를 지르는 제자들과 군중의 뒤에는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길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음모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실 때부터 유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높은 자리로, 영향력 있는 자리로, 더 많이 먹고 누릴 수 있는 자리로 가라는 사단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높은 자리에 앉고 싶었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자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떠났습니다. 호산나라고 찬양하던 군중들은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분노의 함성을 질러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변화에도 요동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뜻하신 십자가의 길로 향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37-39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기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는 표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고 증언합니다. 얼마나 힘을 쓰셨던지 모세 혈관이 터져서 피가 땀에 섞여 나와 마치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이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고통스런 십자가의 죽음을 겪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내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순종의 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담과 하와가 높아지기 위해 불순종의 길을 택해 에덴에서 추방당함으로 인류에게 죽음과 멸망의 고통을 가져 왔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 구원을 위해 가장 천하고 낮은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불순종으로 멸망에 이르렀다면 예수님은 순종으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바로 순종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내 뜻을 버리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셨을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뒤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어지는 부활의 영광입니다.  

오는 한 주간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뜻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함께 기도하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삶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자신의 뜻과 생각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제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다름을 봅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뜻을 포기할 줄 모르는 제자들은 긴장감이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는 가운데서도 그들에게는 절박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순종의 길을 걷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이번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만이라도 새벽 시간을 통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순종의 길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 기도회를 통해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함께 걷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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