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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를 아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사 60:1-3,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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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아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사 60:1-3, 막 11:1-10)


이사야 60:1-3,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마가복음 11:1-10,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던 그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 날,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우는 구원자,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려는 죽음을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따르던 제자들은 실망과 좌절로 뿔뿔이 흩어지고 물러갔습니다.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 잡으러 가버린 일곱 제자들, 엠마오 고향으로 낙향하는 두 제자, 두려움으로 숨어버린 제자들 등.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절망하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며, 관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절에서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하시며, 17:21, 20:18절에서도 계속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생명을 얻게 하는 구원을 얻게 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 일이 닥쳤을 때 절망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추구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를 안다면,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불안해하거나 절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때를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말씀의 의미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 본문말씀은 아직 이르지 않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되어 질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은 70년이었습니다. 고국은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였고, 남은 백성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절망과 서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을 향하여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고 선포합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라고 하십니다. 일어나서 빛을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어두운 그늘은 지나갔고 이스라엘의 빛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지금까지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어두움이 모두 걷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은 ‘실패와 고난과 좌절과 폐허의 얼룩 속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아는 지혜가 있어야 어떤 환경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본문말씀은 앞서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한 마디로 ‘구원의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림 당하시고, 온갖 수모와 멸시와 고난을 당하시며, 끝내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극형을 받으시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생명의 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곧 ‘구원의 기회’가 제공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생명을 얻는 가장 큰 행복의 기회입니다. 만일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원한 저주의 형벌에서 울부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목적도 없이 그저 무엇엔가 쫓기듯이 바쁘게 살다가 때를 놓치고 인생의 날이 저물면 몸서리치는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때를 아는 지혜를 사십시오.

※ 때를 아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말씀들이 다 중요하지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용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원, 십자가, 고난, 부활, 영생 등의 용어들입니다. 그 중의 하나인 기회를 의미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시기’, ‘기회’, ‘때’ 모두 어느 중요한 한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들입니다. 

요한복음 9:4절에서 예수님께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시며, 때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16-17절에서는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시며, 역시 기회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때의 중요성은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때를 놓쳐서 꼭 필요한 물건을 놓쳤다든지, 차를 놓쳐서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낭패를 당한다든지 하는 일들을 흔히 겪게 됩니다.

‘스테판 더글라스’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기관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시간계획과 자기관리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서입니다. 이 책의 서론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 ‘오늘 남쪽에 밭을 갈러간다.’고 하며 트랙터를 몰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는 트랙터에 기름을 넣기 위하여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주유소에 가는 도중에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차를 들판에 세워둔 채 그는 기름을 사기 위하여 주유소로 향했습니다. 

주유소로 가는 길에 그는 돼지에게 아침밥을 주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옥수수 창고로 가서 돼지 사료로 쓰이는 먹이 자루를 찾았습니다. 그 자루들을 보자 그는 저장고에 있는 감자에 싹이 트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감자 구덩이를 향하여 가는 길에 장작더미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아내가 ‘장작을 가져달라.’는 말을 한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몇 개의 나무토막을 줍고 있는데 병든 닭이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저 닭이 왜 병들었을까?’ 하고 그는 장작을 내려놓고 그 병든 닭을 쫓아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들판에 세워둔 트랙터에 기름을 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생각에 쫓기고, 무엇인가 바쁘게 이리저리 다니다가 적절한 기회를 모두 놓쳐버린 허망한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무엇인가에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유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26-29절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때를 알아라.’고 하십니다. 어느 날 홀연히 닥쳐올 죽음의 때, 아니면 번개가 치듯이 순식간에 일어날 예수님의 재림의 때, 이때를 알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때를 준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때가 올 줄 알고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런 날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알고 준비해?’ 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도서 9:12절입니다.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사망하는 사람이 700명이 넘습니다. 그 중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43명이나 됩니다. 세계적으로는 매일 15만 명 이상이 생을 마감합니다. 이들 중 극히 일부는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재앙의 그물에 걸려 영원한 고통으로 빠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이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아십니까? 때를 알고 준비했다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겠지요.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전도서 3:1절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시면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8절까지 때를 이야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 25:11절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닥치는 수많은 때를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때를 아는 지혜는 어떻게 얻으며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영국 의학협회에서 병 치료에 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표했습니다. 연구를 담당한 ‘하이슬루프’ 박사는 말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치료법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말하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박사는,

“기도의 힘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신경과민을 조절해 줍니다. 그래서 언제나 환자가 올 때마다 환자들에게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항상 기도하시오.’”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잠언 9: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십니다. 지혜를 얻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고 높이며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어서 자신의 때를 안다고 할지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1:22-24절을 봅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 말씀은 고쳐야 할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고쳐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바꾸어야 할 것 등 이런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합니다. 영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자리, 영생에 대하여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없는 자리에서부터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70년의 노예생활로 물들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그 어두움을 벗어버리고 빛을 비추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는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떠나야 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하시고 회복시키셔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소설가 ‘이창동’씨가 쓴 ‘두꺼비와 달’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김흥남’이라는 사람은 6.25전쟁고아이며, 생의 밑바닥에서 질경이처럼 세상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억만장자인 친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속고 속으며 살아왔기에, 흥남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심증은 충분했지만 자기 재산을 탐낸 사람들의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흥남에게 ‘자기와 서로 헤어지던 그 당시의 기억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 때 아들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으니 극적인 옛 상황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흥남은 옛 일을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전혀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동안 까맣게 잊혀졌던 그날의 사건이 너무나 뚜렷하게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그 어른이 아버지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흥남은 자리를 박차고 정신없이 아버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흥남은 돌아가신 그 분이 바로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피 맺힌 주장을 폈지만, 그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미친 사람 취급뿐이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준비하지 못하여 기회를 놓친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십니다. 기회를 놓치고 때를 놓치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이 생명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주신 이 행복을 놓치지 않도록 때를 알고 기도로 깨어 있어서 준비하는 지혜로운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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