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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후에는 알리라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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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알리라 (요 13:1-11)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행하신 일들은 대부분 기이했습니다. 그래서 따르는 무리들도, 심지어는 동행하는 제자들도 오해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알고서 말씀하시고, 알고서 행하셨기 때문이고,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들은 모르고 듣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시시해도 모르고 보면 신비할 수 있습니다.  

우수광스럽게도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기행이 따로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겉옷을 벗으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한사람씩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떠나실 때가 다가왔고 마귀는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을 때였습니다(1-2절). 

이 위험하고 긴박한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운 행동 한 가지를 제자들에게 또 보이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원래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들의 몫이었고 아랫사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생각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그냥 발을 내밀어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베드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발 대신에 의문을 내 밀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해볼 때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시고 닦아주시는 것은 인간 도리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드리고 닦아드리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거꾸로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7절 말씀에  예수님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시며 달래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베드로는 자기의 발을 예수님께서 씻어주시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베드로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많은 난관과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 문제들이란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자녀들의 문제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어떤 재난과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문제가 있는가하면 또한 공동체적이고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 앞에서 때때로 우리는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또한 낙심합니다. 그리고는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의문을 표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슬픔이 우리 가정에 있어야만 합니까?" 
"왜 이렇게 비참한 재난이 이 땅위에 존재해야만 합니까?"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우리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들도 그랬고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입니까?" "어찌하여 그랬습니까?"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인생의 문제와 그 의미를 다 깨닫기에는 우리가 늘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서두른다고 앞당길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때가 되어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수준의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알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1절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하셨고,  3절에서도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고 하셨으며, 10절과 11절에서도 ".....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셨고, 이 일을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할 가룟유다의 배신도 이미 알고 행한 일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일을 제자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알고 행하신 일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아멘'
  
지금은 모를 수 있습니다.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일도 때가 차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그리고 지나가면 그떄서야 알게 됩니다. 
왜 모릅니까? 우리 수준 때문입니다. 영적 이해력이 약해서입니다. 좀더 지니서 자라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이 놀라운 행동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그 영적 지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점점 더 자랄수록, 우리가 영적으로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알지 못하는 일도 이후에는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당장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급하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쩝니까? 지금 당장 알수 없기 때문에 놀라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제 당장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불안하고 미움이 솟아오르고 그래서 대적자가 되고 배신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인내하시고 소망을 품고 멀리 내다보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 일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주신 교훈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교훈일까요? 바로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이후에는 알게 된다"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필요없는 일이 아닙니다. 당장 깨닫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함부로 이러니 저러니 불평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 믿고 기다려보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고 깨닫게 될 시간이 반드시 오게됩니다.  

우물가에서 승늉 구한다는 말이 있는데 서둔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실 메달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후에는 알리라"는 주님의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고 소망을 품고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보는 미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주님께서 이처럼 너그러우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이 사랑이, 지금은 알지도 못하면서 투정이나 하고, 불쑥 불쑥 나서기나 하는 제자들,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서 예수를 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가룟유다, 스승이 눈믈을 삼키면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해야 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의미도 모르는체 철없이 발을 맏겨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믿어주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허물을 몰라서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아주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발을 씻음 받은 사건의 경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해주셨는데 내가 왜 이러나 하면서 곧 다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주시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을 믿고 참고 인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사랑이든지 "후에는 알리라"는 심정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 몰라준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뿐만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당할찌라도 "지금 당장 시련의 의미를 알지 못할찌라도 언젠가는 알레 되리라. 이후에는 알게 해 주시시리라"는 심정으로 믿고 기다리고 인내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릉으로 축원합니다. 

3. 지금 알지 못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주여 왜 주님이 내 발을 씻어주십니까?"하는 베드로의 물음에 주님은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그리고 베드로 네가 나에게 발을 씻음받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게 발을 내밀어 씻음을 받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가 된다 하시면서 선택을 명하셨습니다. 설득과 이해보다는 선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하라하신 것입니다. 지금 머리로는, 지금 영적 상태로는 아무리 설득을 하고 이해를 시키볼려고 해도 되지 않음을 에수님께서 아셨기에 받아들일 것이냐 말것이냐를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깜짝놀라 "주여 그렇다면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쉽게 감동하고, 쉽게 낙심하고, 쉽게 결정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성품이 꼭 단점으로만 작용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설득과 이해보다는 순종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베드로의 장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생살다보면 지금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 뿐이겠습니까? 머리로 납득된 일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살이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당장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은 다 모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왜 그런 일이 있어야만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재난이 닥쳐왔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 의미를 다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하고도 안심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의미를 이후에는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처럼 "이후에는 알게 될 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시고 조금더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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