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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막 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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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막 16:1-20)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아침입니다. 사망의 불안과 공포의 밤이 지나고 생명의 새날이 밝았습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가장 통쾌할 때가 언제입니까? 역전의 때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역전의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여 무덤에 장사지낸 후 돌로 막아 인봉하고, 무장한 병력이 지켰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자축했을 것입니다. 그 누가 보아도 예수님은 실패자요, 그들은 승리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단번에 승리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이분은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주일 아침 인사가“예수 다시 사셨네!”였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로 지키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이 곧 오늘날 우리들이 매주 마다 예배드리는 주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신자나 불신자나 다 예수님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준으로 쉬기도 하고, 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섬기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20억이 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는 선진국입니다. 

인류가 남겨놓은 역사가운데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들이 많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렇고, 바늘 끝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석축을 쌓은 마야문명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석굴암이 그렇고, 백제 무령왕릉을 축조한 벽돌이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현대과학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그 역사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입니다. 부활하신 빈 무덤이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시편 2편 10절 말씀에 예언하시기를“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시기전 약 1천 년 전에 살았던 다윗 왕을 통해 예언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성경의 정확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8절에 말씀하시기를“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訃壤�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만민 부활의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절~16절, 19절~20절 말씀에“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만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부활의 증거인 첫 열매라는 것입니다. 첫 열매란, 농사지은 논밭의 곡식이 익어 추수를 하기 전, 먼저 한 단을 베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첫 열매란, 그 한 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밭에는 그와 같은 곡식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부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 덜햄 지방의 석탄광이 무너지면서 164명의 광부들 모두 산채로 생매장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시체를 발굴하면서 글이 쓰여 있는 판자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그 판자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화요일 오후 2시”지하에 매몰된 광부들은 자신들이 곧 산소가 부족하여 죽는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모두 모여 죽음을 준비하며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부활과 영생을 믿고 기쁨으로 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할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고, 내일 세상 종말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관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의 주가 되시는 증거입니다.

로마서 14장 9절 말씀에“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셨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주, 우리들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가룟 유다의 꼬임에 넘어진 것이며, 로마 군인들에게 패배한 증거이며, 사탄에게 패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귀신이 두려워하며 물러갔습니다. 바다의 풍랑이 복종했습니다. 그 두렵고 무서운 죽음의 권세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들의 유일한 구주가 되시기에 넉넉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주인이신 가장 명확한 증거는 부활입니다. 이 땅위의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 가운데 유사한 점들이 있습니다. 윤리를 강조하는 것, 선한 일에는 상이 있고, 악한 일에는 벌이 임한다는 것, 내세를 말하는 것, 정성을 다해 자신의 신을 섬길 때 바라는 소망이 성취된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입니다. 빈 무덤입니다. 

만일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윤리도덕을 말한다면 유교로 족합니다. 병 낫는 것을 기독교만의 특색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불공을 드려 병 나은 사람이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물로서 병을 고칩니다. 무당도 주술로 병을 고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술로도 병을 고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유가 기독교만의 특징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 가운데 물질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가운데에도 부자가 많습니다.타종교는 그들 교주의 웅장한 무덤을 자랑하지만 기독교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석가모니의 무덤은 인도의 실수에 있고, 공자의 무덤은 중국 창평창에 있으며, 모하멧의 무덤은 아라비아 메카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랑은 예루살렘에 있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죽음을 이긴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죽음은 모두가 무서워하며 싫어하는 인간 최대의 난제입니다. 이 난제를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므로 유일한 구주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의 산 소망이 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4절 말씀에“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소망은 다 변합니다. 때가되면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건강도, 재물도, 권세도, 행복도 모두가 변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솔로몬 왕은 전도서 1장 2절에 말하기를“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세상의 것은 영원한 소망 즉 산 소망이 아닙니다.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의 미망인인 재클린 여사는 남편 사망 1주기를 맞이하여 말하기를“나는 그분과 함께 늙어 가리라고 꿈꾸는 것이 지나친 소망이었음을 미리 깨달았어야 했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소망은 기대할 것이 못됩니다. 모두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누렸던 것이 변하게 되면 그때는 허탈하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참된 소망 즉 산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만 있습니다. 그 산 소망의 증거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을 가진 한 성도는 세상의 것들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사망의 바람에 이슬 같이 되나 나의 귀한 목숨 영원일세. 

오늘 밤 나의 몸 안개 같이 이 생명 끝나면 내일 아침.
나의 귀한 영혼 어느 곳에 갈까 주님가신 나라 나도 가네.

죄 범한 나의 몸 매일 매시 죽을 때와 심판 가깝도다.
구주여 내 영혼 구원 하옵시고 인휼히 여기사 받으소서.

죄인 괴수라도 버리잖는 주의 넓은 은혜 한량 없네 
십자가의 고난 나 위해 받으신 구주의 품안에 안깁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는 순례자이며 우리의 확고한 지위는 내 본향 천국에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므로 우리 그리스도들은 이 세상 어디서 살든지 유랑의 장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말씀에“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향을 찾아가는“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가신 하늘나라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민 부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산 소망이 됩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크신 능력이 우리 모두 위에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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