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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달려라, 더 빨리 (요 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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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더 빨리 (요 20:1-10) 
  
고속도로는 현대의 경쟁 사회를 상징합니다. 고속도로의 특징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일사천리 탄탄대로라는 것과 중앙선과 추월선이 있다는 점입니다. 
  
옛날 도로는 중앙선도 없고 추월선도 없었습니다. 앞차가 느리게 가면 뒤차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추월선이 있습니다. 빨리 가는 차는 빨리 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속도는 문명의 상징이요, 척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경부고속도로가 1973년에 개통되면서 일일 생활권이 되었습니다. 그 고속도로가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가로, 중진국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선진국으로 역사를 바꾸려면 추월선을 달려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갑니다.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유혹을 뿌리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갑니다. 

  
󰊱 무덤을 향해 걸어가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1절)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마28:1)가 보니 무덤을 향해 갑니다. 가서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시간은 이른 새벽인데 여인들이 무덤을 향해 간 것입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어 고요하고 그 언저리는 무섭기도 합니다.  
  
무덤은 보편적인 회합의 장소입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두 만나는 곳입니다.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나 용감한 자나 겁쟁이나 함께 있는 곳입니다. 
  
무덤은 절대적인 평등의 장소입니다. 고관이나 농부나 임금이나 노예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무덤은 더 이상의 소요가 없이 고요한 곳입니다. 뺏으려고 안 뺏기려고 다투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여인의 새벽길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 죽음이란 육신적 생명의 완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인생은 사십부터가 아니다 이십부터도 아니고 육십부터도 아니다 십자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새생명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살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로 인사를 했답니다. 자신의 죽음을 한 인생의 완성으로 기억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죽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마28:6)
  
주님의 무덤을 향해 가는 여인을 보며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죽음은 저주일 뿐입니다. 있을 곳이 없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으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계14:13)
  
인생은 죽음에서 부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죽음에서 심판으로 연결됩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죽음에서 심판으로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의 모든 슬픔과 죄악의 장례식이며, 기쁨과 영광의 부활입니다. 
  
“오 그대 나의 영혼의 영혼이여! 나는 그대를 다시 포옹하리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쉬리라”(로버트 브라우닝)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 문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십시다. 그의 빈 무덤을 보십시다!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 제자들에게 달려가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절) 
  
마리아는 무덤에 가서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간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마28:6) 마리아는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알리기 위해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유레카!”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의 말입니다. 시라크사의 군주 히에로 왕이 순금 덩어리를 세공에게 주며 금관을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완성된 금관을 보고 왠지 불순물이 들어간 것 같은 의심이 생겼습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를 불러 금관에 불순물이 들어 있는지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고민했습니다. 왕관을 녹여 분리 작업을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어느 날 공중 목욕탕에 갔는데 물이 가득 찬 탕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물이 흘러 넘치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물 속에서 벌떡 일어나 유레카! 유레카!라고 소리치며 벌거벗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곧 실험에 착수하여 왕관에 불순물이 들어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에 가서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본대로 사도들에게 알리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시급하게 알려야할 놀라운 일은 무덤 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천천히 말해도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빨리 가서 알려야했습니다. 
  
기원전 490년 아테네 북쪽에 있는 마라톤 광야에서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싸웠습니다. 그리스를 침략해온 페르시아 군대를 그리스가 격파했습니다. 한 병사가 그리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40km를 달려가서 “우리가 이겼다!” 그 한마디를 외치고 쓰러졌습니다. “우리가 이겼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죽었습니다. 마라톤은 거기에서 유래되어 42,195km를 달리는 장거리 경주로 올림픽 종목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매주 일요일을 주의 날로, 매주일을 부활하신 날로 지킵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외쳐야 합니다. 주께서 살아나셨다! 진실로 사셨다!
  
달려라, 더 빨리! 복음을 전하는 일로 달려가십시다! 가서 알립시다! 가서 전합시다!

   
󰊳 더 빨리 달려가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모두 달리기 선수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갈 때는 천천히 걸어갔으나 무덤을 보고 나서는 달렸습니다. 지체할 수 없는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혼자만 알고 있을 일도 아니고 알고도 모른 척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급히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발빠르게 뛰게 한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무덤을 향해 달립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 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3-4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사도들을 배워야 합니다. 앞서는 자와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장서지 못하거든 따르기만 잘하면 됩니다. 
  
요한은 베드로 보다 젊어서 발이 빨랐지만, 요한은 흥분과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덤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열적이고 성질 급한 베드로는 무덤에 도착하자 무덤 안으로 직행합니다. 요한은 그때서야 베드로의 뒤를 따라 들어갑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믿음의 산실, 소망의 집이 되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 현장을 본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리는 원동력이 발생합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의 발걸음은 빠르고 힘찹니다. 
  
한 신하가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가장 아끼는 보물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대왕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희망”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 가장 값진 보물입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것은 “희망의 상실” 이요, “희망의 부재” 입니다. 
  
여러분을 지탱하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경험하고부터 그들은 부활을 살았습니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부활의 생명, 죽음에서 벗어나는 생명, 죽음을 이기는 생명,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생명을 갖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와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고전15:4-8) 그가 부활신앙으로 사는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어떤 사람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의 소생이라”(행17:28)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들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절) 

요한은 베드로의 뒤를 따라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믿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 항상 불만인 사람에게 창조주가 말합니다. 자네, 기적을 보고 싶나? 
너 스스로 기적이 되라! 그렇습니다. 내가 부활하자 내가 부활이 되어 사십시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 인생 역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살아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부활을 사는 사람들은 꿈과 희망을 가지고 달리고 또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꿈과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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