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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내게 있는 이것으로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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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는 이것으로 (행 3:1-10)

아직까지도 남아선호사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평소에 아들을 가지기를 소원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히11:1절을 읽고 감동을 받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성경말씀을 떠올려가며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바라는 것은 아들입니다. 그 바라는 것의 실상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아예 아이의 옷을 사다가 걸어 놓고 그야말로 세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옷에는 나의 바람이 있습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인 아들을 주셔야하겠습니다. 옷은 있는데 저 옷을 입을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의 믿음을 완성시켜주시옵소서” 날마다 이렇게 기도했더니 정말 하나님이 아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를 낳고 보니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속이 상해서 성경도 거짓말이고, 하나님도 거짓말쟁이다 싶어서 하나님 앞에 항의 기도를 합니다.

“아, 하나님!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아들을 바랐고 옷도 사다 놓고 기도 했는데 딸을 주시면 어떡합니까? 아들을 주셔야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야, 사다 걸어 놓은 옷을 잘 봐라” 하더랍니다. 가서 자세히 봤더니 여자아이 옷이었답니다. 거저 급한 마음에 색깔만 보고 샀는데 이제 보니까 여자아이 옷이 맞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성경말씀대로 과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정확하게 맞지요?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며 살아갑니다. 무능력한 사람은 능력을 필요로 하고, 병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치유일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희망이 필요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그런가하면 고독에 빠져서 목말라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죄 많은 세상에서 자기의 죄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죄 사함, 곧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무력하고, 병들고, 절망하고, 배고프고, 고독하고, 죄책으로 시달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총체적인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필요충족의 요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한 가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가진 욕구란 인간이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부족하며, 충족은 했다고 하나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풍요 속에 빈곤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철저히 무능력합니다. 의학의 발전이 있고, 과학이 눈부시다 하지만 인간은 병이 들고 죽어가며 뿐만 아니라 그 삶에 절망이 있고, 배고프며 고독합니다. 그리고 죄는 더해 갈 뿐입니다. 이런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유일한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이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치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만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용서와 구원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믿음이 왜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입니다. 행4:22에 따르면 이 사람은 마흔이 된 사람입니다. 40년간 일어나 보지 못한 채로 절망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배고픈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로 체험하며 사는 거지였습니다. 

날마다 성전 문에는 앉아 있지만 사실 성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누군지 관심이 없습니다. 더 더욱이 성전 안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은 날마다 사람을 만나지만 관계는 단절된 사람이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있지만 실상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철저히 고독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그는 자유마저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정신적 자유, 육체적 자유를 겸하여 잃었습니다. 가고 싶은 자유, 하고 싶은 자유, 먹고 싶은 자유마저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오로지 필요충족의 조건은 하루하루 육체적 삶을 연장하는 물질을 구하는 동물적 본능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복음에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아프고 또한 안타까움입니다. 교회 주변은 맴도는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걷지 못하는 사람처럼 교회 문 앞에 늘 머물러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단지 이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마음대로 교회를 드나들 수 있다는 것 하나입니다. 노래는 부르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교회의 일은 하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헌신이 없고, 설교는 들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순종하지 않고, 은혜와 나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빗나간 이론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이면서 진정한 은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봉사는 하지만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하고, 열심히는 드나들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없는,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한 삶이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삭막한 세상이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베드로와 요한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허황된 이론이나 잘못된 신학에 빠져서 스스로 무너지는 그런 삶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요한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요, 자기 주머니에 돈 한 푼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며 의기소침하고 원망하며 불평하고 짜증내는 그런 사람들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돌아 볼 줄 아는 적극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숱한 사람들이 매일, 시간마다 성전에는 드나들었지만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한 자기에게 있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또한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빈털터리 같은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신앙은 자신감을 가지게 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우리가 가진 돈은 없지만 우리가 가진 예수의 이름을 당신에게 준다. 예수를 믿고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의지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또 다른 것이 있는 중에 하나인 예수가 아니라 오직 하나 예수의 이름만 생각하고 예수의 이름만을 목적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것저것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이것저것 중에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가나 취미생활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고상한 문화생활 중에 하나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신앙은 하나님뿐입니다. 다른 곁길로 가지 마십시오. 은혜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배워야할 또 한 가지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활용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 는 것보다 “내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 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지, 재능이든지...그 무엇이라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난할 때 남을 도와 보지 못한 사람은 돈이 많은 부자가 되어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시간이 없고 바쁠 때라고 전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이 남고 한가해도 절대로 전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자신들에게 있는 그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내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용도 없고, 변화도 없고, 성숙도 없으면서 얼마나 믿었느냐는 신앙생활의 기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알량한 지식으로 듣고 배웠다고 진리 아닌 것을 고집하면서 은혜도 없이 살아가는 고집만 가지고 있습니까? 다만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이 있고, 사랑이 있고, 그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진실이 있는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최소한 지금 이 시간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이라면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당당히 가슴을 펴고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누구를 향해서도 “내게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당신에게 줍니다. 이게 나의 전부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선포 할 수 있는 떳떳한 신앙적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그 무엇에 있어서도 이 정도의 신앙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무엇이 더 필요하여 그렇게도 비참하고 유치하게 발버둥 치십니까? 예수면 안 되겠습니까? 예수만으로 부족합니까? 왜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진정으로 필요한 예수는 늘 묻히고 살아야만합니까? 은혜면 안 되겠습니까? 왜 은혜에서 떠난 교만의 모습으로 똑똑하다고 우기며 살아갑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예수님을 듣고 받아들이고 40년의 굳은 자리에서 단숨에 일어났던 사람처럼 이제 우리들의 삶에도 <내게 있는 예수>로 인하여 게으르고 좌절했던 자리에서, 교만했던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서, 고정관념과 자기집착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서 믿음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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