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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롬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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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롬 6:6-9)

로마서 10장 9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복음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를 시인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사신 그리스도 또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보면 죽으신 그리스도는 믿어지는데,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지요?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차이를 알아야. . .

정명식이 쓴「세미꼴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미화는 죽음에서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하기 때문에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둠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죽음의 차이를 아는 것이 올바로 신앙을 이해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끝인 죽음과 새로운 시작인 죽음"의 차이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부활은 '죄의 삶'에 종지부를 찍은 십자가의 죽음의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아주 강력한 선언입니다.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 ."

종노릇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발목을 잡힌 것입니다. 죄의 끈이 질기게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마치 사채 이자처럼 말입니다. 원금을 갚지 못하면 점점 불어납니다. 감당하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왜 사채이자를 쓰게 됩니까? "어쩔 수 없어서."

누가 죄를 짓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데 그 죄가 계속해서 우리를 옭아맵니다. 죄는 독특한 특성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입니다.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의 기억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죄의 기억은 우리를 쉽게 또 다른 죄로 이끌어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능력입니다.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기소중지"가 됩니다. 

지난해 우리가 초대 교회를 공부하면서 요한계시록 3장에 나와 있는 사데 교회를 보았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살았지만, 살아있는 자의 능력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죽음의 권세 아래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죄의 권세가 우리를 채우고 있으면 생명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생명력이 있다."라는 말은 편안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역동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죄의 능력을 우리의 힘으로 비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채우면 죄의 능력이 떠나갑니다.

지난 구정에 영화를 보았습니다. 김명민이라는 배우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페이스 메이커'라는 영화입니다. 마라톤 유망주였던 주인공이 선천적인 기형 때문에 42.195km를 완주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집안, 동생을 위해 형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우승을 도와주는 페이스 메이커로 살아갑니다. 30km를 잘 달리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의 우승을 보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을 때, 운동회에서 라면 상자를 받기 위해 열심히 달렸습니다. 동생이 빨간 우산을 펴면 열심히 뛰고, 접으면 천천히 달렸습니다. 왜냐하면, 2등을 해야 라면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열심히 뛰어왔지만, 이제 번듯하게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서기관이 된 동생에게 자신은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도전하지만, 그는 또 실패자였습니다.
역시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런던 올림픽에 출전합니다. 30km 구간까지 1시간 28분 대만 유지하면 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는 열심히 그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그를 위해 맞춰진 운동화를 신고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포기하려는 순간, 런던까지 날아온 동생의 얼굴, 그리고 어린 시절 펼쳤던 빨간 우산이 활짝 펼쳐집니다. "빨리 달리라는 신호"를 보고 형은 뛰기 시작합니다. 다리가 뒤틀려 넘어집니다. 응원하는 사람의 깃발을 빼앗아 철사로 다리를 찌르고 피를 흘리며 뛰어갑니다. 열심히 달리며 스타디움에 들어와 1위와 각축을 벌입니다. 그는 승리자였습니다. 이제 과거의 아픈 기억이 그를 붙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2013년 보스턴 마라톤에 그는 페이스메이커가 아니라 정식 선수로 멋지게 달려나갑니다.

제가 목사라 그런가요?
영화를 보면서 빨간 우산이 펴지는 순간 그리스도의 보혈이 생각났습니다. 허벅지를 찌르며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며 패배가 아닌 승리를 보았습니다. 더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꿈을 향해 뛰어가는 한 사람의 승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타디움에서 그를 열심히 응원하는 한 사람, 역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미녀 높이뛰기 선수가 말입니다. 그가 들어오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승리의 눈물입니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선과 악'의 복선이 깔렸습니다. 그의 꿈을 깨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것은 진정한 사랑과 응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이어서 봉독해 보겠습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제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은 부활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활의 능력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

이런 찬양이 있지요.
"부활의 능력, 체험하면서 주님을 위해 나 살겠네.” 
부활은 체험하는 것이고, 고백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 6장 8-9절을 보세요.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실패할 때가 언제인가요? 종종 이런 소리를 하지요? "내가 아직 죽지 못해서 그래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나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었을 때, 이미 우리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면, 그의 죽음은 이미 우리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죄의 그늘 아래 살고 있나요? 본문을 통해 보면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은 아무 영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르고 손해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손해로 자기들이 이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은행에 남아 있는 적은 돈, 찾아가야 할 보험금 등등 말입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 필리핀 섬들의 정글에 숨어 있었던 여러 일본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줄을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군인 중의 한 사람인 히로 오나다 중위가 1974년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을 30년간 정글에서 숨어 지냈던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것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셨을 때 우리도 다시 살아남으로 이제 죄와 사망에 매어 살 필요가 없음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6절의 선언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사단과 죄의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말의 권세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때, 말로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병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았느니라!"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말의 권세는 능력을 가지신 분의 권세입니다. 우리가 그 권세를 입었습니다. 특히 죄와 죽음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종노릇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둘째는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능력 있게 만드는 것은 '지속성'입니다. 선언은 시작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1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긴다.'라는 단어는 본래 회계학에서 사용하는 '계산한다.'라는 뜻입니다. 계산은 정확해야 합니다. 계산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지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사실대로 늘 의식화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의식화"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죠. 신입생들이 운동권에 들어가 의식화되면 그 신념이 무섭습니다.
진리와 권세가 우리의 삶에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며 "여겨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우리가 자유함을 선포해야 합니다.

남북전쟁 이후에 노예들에게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는 너무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에게서 노예의 근성이 나왔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렇게 선포해야 했습니다. 
"노예는 죽었어. 넌 이제 자유인이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자유를 위해 싸웠을 때 가장 힘든 것은 백인들의 핍박보다 흑인들 스스로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예로서 꿈꾸지 못했던 꿈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I have a dream!"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나는 매일 죽노라!"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사역자로 살아가지만, 매일 고백해야 했습니다. "나는 죄와 욕망에 대하여 매일 죽는다!"
우리 같이 오늘 본문을 봉독해 볼까요?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셋째로 산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었음을 인정하고 매일매일 시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죽음의 종류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인 죽음이 있고 시작인 죽음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죽은 이유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산다는 것은 죄와 사망을 이기고 "살아난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로마서 6장 11-13절을 보세요.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을 "산 자같이"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몸의 목적이 달라진 것이죠. 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던 우리의 몸이 이제 의로운 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처럼 어떻게 쓰이는가,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 이제 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죽음을 경험한 자만이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죄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하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3-37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한 가지 이야기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스티브 잡스도 빌 게이츠도 오바마도 아니라고 합니다. 현재 모든 인터넷 조회 수, 클릭 수의 기록을 갈아엎은 인물, 요한복음 3장 16장의 전도사, 바로 “팀 티보”입니다.

미국 미식축구 덴버 브롱크스의 쿼터백 팀 티보는 필리핀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 초기에 아메바에 감염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의사가 낙태를 권고했지만, 목숨을 걸고 티보를 낳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선교사의 가정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던 팀 티보는 동네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결과 대학 미식축구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티보가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된 것은 2009년 1월 8일. 대학미식축구 최강자를 가리는 BCS챔피언십에서입니다.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플로리다와 오클라호마가 진검승부를 펼쳤습니다. 스코어는 24대 14, 플로리다가 그 해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구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게임내용에 대한 검색 때문이 아니라 티보의 아이패치(혹은 아이블랙, 선수가 햇빛 반사를 막기 위해 눈 밑에 검댕을 칠하는 것)에 쓰인 글자 때문이었습니다.

‘John 3:16’ 티보는 평소 경기할 때 아이패치 위에 흰 물감으로 성경 구절을 써놓곤 했습니다. 엡 2:8-10, 막 8:16, 사 40:31 등등. 마침 이날 티보의 아이패치에는 ‘요 3:16’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John 3:16’이 뭔지 알아보기 위해 무려 9,300만 명이 몰려들어 검색을 해대는 통에 구글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날 역전승의 주역이었던 티보로 말미암아 ‘요 3:16’은 구글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를 끌어 모은 검색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학풋볼의 슈퍼스타인 그가 프로의 세계에선 빛을 발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러싱에 비해 패싱이 부족하기 때문에 프로에서는 벽에 부딪힐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2010년 티보는 덴버 브롱크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시즌을 거의 벤치에 앉아 보냈습니다. 2011년도 교체용 선수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언론들은 일제히 ‘그의 승리는 우연이었을 뿐, 쇼는 끝났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던 티보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팀이 1승 4패로 극히 부진하자 감독은 ‘티보 카드’를 뽑아들었습니다. 티보는 프로경기에서는 금지된 아이패치 대신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티보잉’ 사람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그의 행동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티보잉이 시작되면서 함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덴버는 1승 3패 이후 7승 1패의 성적을 거두며 꼴찌에서 일약 리그 단독 선두로 날아올랐습니다. 티보의 역전승이 계속되며 팀은 결국, 2011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10월 23일 마이애미 돌핀스와의 원정경기, 4쿼터까지 치열한 접전 끝에 23대 23으로 경기가 끝나고 연장전이 시작되자, 티보는 연장 11초 만에 극적인 역전 터치다운을 이뤄내고 맙니다. 그것도 전문가들이 그의 약점이라고 판단했던 패싱으로 말입니다. 동료가 뒤엉켜 환호하는 가운데 티보는 한 편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경기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티보가 열 번의 패스에서 기록한 총 패싱 거리는 316야드였고, 리서치 결과 이날 이 경기의 시청률이 31.6%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아이패치에 쓸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그라운드의 경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써 주셨던 것입니다. 이날 경기 후 새로운 기록이 세워졌는데, 구글의 이날 ‘요 3:16’의 검색 수가 1억 2천 번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 경기 이후 ‘티보잉’은 삽시간에 온 세계로 퍼져 나가 플래시몹의 형태도 수많은 ‘따라 하기’ 사진들이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티보잉 닷컴이라는 웹사이트도 개설되어 전세계의 네티즌들이 자신의 기도장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헬기 조종사로부터 유명 여배우, 아프리카의 원주민 등 수많은 사람이 서프보드 위, 비행기 안, 학교 교실 등 장소를 불문하고 티보잉을 따라 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사진이 1시간에 2-3건꼴로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열풍으로 ‘티보잉’이라는 말이 신조어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는데, 그 뜻은 “주변이 어수선해도 기도에 열중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티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사랑하는 이에게 단 한 번이 아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을 자랑할 것입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쿼터백 토니 로모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하늘이 돕는 선수를 막아낼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세상이 감당치도 못하고, 세상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이기도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부활의 기적을 믿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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