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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르라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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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요 21:15-23)


2011년 3월2일, 파키스탄의 샤바즈 바티(Shahbaz Bhatti) 장관이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암살을 당했습니다. 소수민족부 장관으로 신성모독법 폐지 등 소수민족과 종교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앞장을 서왔던 인물이었습니다. 바티 장관은 내각 내의 유일한 기독교 신자로서 이슬람 과격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아왔었습니다. 바티 장관이 피격당하기 얼마 전 미국 LA 한인교회를 방문해서 간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 장관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 받는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형제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장관으로 세우신 것은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도인을 ‘예수를 따르는 사람’ (Follower of Jesus)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자기 역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한 비디오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과 소수 종교인들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죽음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명하시는 것은 먼저 따르는 일부터 하라고 하십니다. 제자가 누구입니까? 따름을 배우고 난 뒤에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워주시면 다른 이를 이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따르는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따름을 훈련받지 못한 채 리더십을 발휘하려니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교만합니다. 배려가 없습니다. 결국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끄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따르는 사람이 되려고 먼저 힘써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 요한복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남기신 명령은 ‘나를 따르라’ 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를 부르는 일부터 먼저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실 때 하신 말씀이 곧 ‘나를 따르라’ 였습니다. 예수께서 사역을 정리하시며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도 ‘나를 따르라’ 였습니다. 즉 ‘따르라’는 명령에서 시작된 사역이 ‘따르라’는 명령에서 끝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면 주를 따라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주를 따라가는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 는 말은 원어로 ‘아콜루데이 모이’입니다. 즉 자신의 방법과 주장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랑에 이르기에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 선교사가 중국 대륙의 선교책임자로 있을 때 선교사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후보자는 ‘예수께서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에 가기 원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 원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테일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원하는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들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만이 어려운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낙심한 베드로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만져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며 배신하였지만 그를 찾아오신 예수께서 계속해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더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주의 뒤를 따라가야 할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자신을 이길 수 있습니까?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누가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기에 주를 따르리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국 주를 따르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부족함이 있어도 서로 덮어 주며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견제하고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만큼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복종하고 주를 따라갈 때 곧 주의 사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사명에 이르기에 

미국 보스턴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심한 정신병으로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사납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회복 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부모도 포기해 버리고 면회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회복 불가능이라고 낙인찍힌 아이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회복불가능의 아이를 회복가능의 아이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까? 은퇴한 한 늙은 간호사가 소녀를 찾아와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조차 포기한 회복 불가능아이였지만, 6개월 동안 끊임없이 예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소녀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마음속의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세상을 향해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 불가능이라던 정신 질환마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마음의 빛을 찾은 소녀는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명을 찾았습니다. 그녀가 누구입니까? 헬렌 켈러를 세상의 빛으로 이끈 앤 설리번 메이시(Anne Sullivan Macy) 여사였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랑을 물은 까닭은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심으로 사명을 맡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를 배신하고 절망에 빠진 제자를 격려하여 양을 치고 먹이는 사명을 맡기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주를 따르며 평생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성도들을 돌보고 먹이고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사람 때문에 낙심이 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를 따라가야 합니다. 따름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가야 할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힘들어하고 시험에 드는 어리석은 일은 결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만을 따를 때 사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심령에 기쁨과 감격과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을 따르는 가치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부디 주를 전심으로 따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나 환경을 보지 않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게 될 때 사명에 이르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광에 이르기에 

이태리의 조각가이며 화가였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가 역사에 남는 위대한 예술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14세 때 베르톨도 디 지오바니(Bertoldo di Giovanni)의 문하생이 되려고 찾아갑니다. 지오바니가 그의 대단한 재능을 보고 물었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미켈란젤로가 대답했습니다. “예, 재능과 기술을 꾸준히 갈고 닦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지오바니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을 위해 조각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이니라.” 그러면서 그를 데리고 두 군데 구경을 시켜 줍니다. 하나는 술집 입구의 조각품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당 앞의 조각품입니다. 

둘 다 아름다운 조각품이지만 그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교훈을 준 겁니다. 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린 미켈란젤로는 힘을 주어 대답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제 재능과 기술을 갈고 닦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주를 따르게 되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으나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주를 따라갔기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수 있는 순교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의 죽음이 결코 무가치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이나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에 가장 비극적인 불행으로 여깁니다. 도리어 죽음이 죽음일 뿐이지 어떻게 영광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도 먼 훗날 영광으로 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제자의 길이 험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분명한 이유는 뒤에 나타날 영광이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지 뮬러(George Muller)는 전무후무한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위대한 일을 해 오셨는데 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비결이 있으면 말씀 해주십시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또한 가장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하나님의 칭찬 듣는 일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기울이고, 주님이 책망하실만한 것에 대해서 조심하다보니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삶이 변화되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비결이 있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기 위해 힘썼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기 원하십니까? 주를 따르시겠습니까? 세상을 따르겠습니까? 혹시 주를 따르고 싶어도 환경이 여의치 않아 핑계를 대는 모습은 아닙니까?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를 따르는 삶이야말로 영광을 받을 만한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 는 우리를 향하신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를 따르리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내어 주를 따르면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주를 따르면 사명에 이르게 됩니다. 주를 따르면 영광에 이르게 됨을 믿고 목숨을 걸고 주를 따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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