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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의 해석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창 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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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창 40:9-23)

현대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이란 책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꿈을 “무의식 욕망의 대리적 만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 정신 속의 잠재의식 속에 엄청난 세계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 생각과 욕망이 꿈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욕망이 억제되었을 때 여러 가지 병적인 증세가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발견은 성경적인 진리와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심리적인 치료는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우리 안에 죄로 인한 부패한 본성이 있다고 합니다. 죄성이 감추어져 있다가 죄의 충동이나 자극을 받게 되면 무서운 힘으로 분출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살인하게 되고 성적인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꿈은,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방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 주실 때에 꿈을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꿈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기 전까지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꿈은 창세기, 다니엘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환상이 많이 나옵니다. 신약성경에는 마태복음에 마리아가 잉태할 때 수태의 예고로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되어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꿈으로도 말씀하셨고, 당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꿈이 필요했고, 꿈이 계시의 방편으로 쓰여졌던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완성된 우리 시대의 꿈은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은 오직 성경,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감옥에서 두 관원장이 꿈을 꾸게 되고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해 주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에게 꿈을 주셨다면 그 해석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두 관원장이 꾼 꿈의 해석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능력입니다(9~13절).

술맡은 관원장이 먼저 꿈이야기를 합니다.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은 이 꿈을 즉시 해석합니다. 세 가지는 사흘이며 사흘 후에 바로가 그 직책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요셉의 꿈의 해석은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 떡굽는 관원장도 요셉의 꿈해석을 보고 자기의 꿈을 얘기했습니다. ‘흰 떡 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은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은 그의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은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라’. 그는 요셉의 해석대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고 맙니다. 요셉의 꿈해석은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명확하고 정확한 꿈해석을 할 수 있을까요? 하루아침에 생긴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이면 요셉에게 있어서 꿈은 몸서리쳐지는 일입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노예가 되었고 꿈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꿈 이야기만 들어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꿈을 듣고 즉시 정확한 해석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요셉은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았고 전능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꿈을 반드시 이루어갈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능력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지식이나 정보를 통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은 정보와 지식입니다. 이것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안다”는 것은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입니다. 

어떤 때는 꽃을 바라볼 때 조화인지 생화인지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조화에는 향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화는 생명이 있습니다. 조화가 훨씬 더 싱싱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향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어있는 삶입니다. 마치 조화와 같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왜 영적인 지혜와 능력이 부족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책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단 11:32절 말씀을 보면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알 때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 3:8에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습니까? 돈벌기 위해서입니까? 건강하기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명확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분별해서 이 세상 속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이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패합니다. 방황합니다. 참된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남는 것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해주시고 지혜를 부어주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것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성도의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벧전 4:11절 말씀에 보면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온갖 세상적인 말만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어야 지혜를 말하고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2.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라(14절).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이 고백은 요셉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해석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술맡은 관원장을 통해서 자신이 감옥에서 나갈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는 옥에 갇힐 일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자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들에 대해서, 또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언급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고, 눈물과 아픔이 있습니까? 쓰라린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요셉은 술맡은 관원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호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셔서 구원받게 된 것이 은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요셉은 감옥에 갖혀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그에게는 ‘은혜’(헤세드)가 없습니다. 

오직 은혜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오늘 요셉은 절망적인 감옥의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 속에서도 춤을 추게 하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요함을 느끼게 하고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은혜를 경솔하게 대합니다. 은혜는 사모하고 간절히 바랄 때 부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반드시 은혜를 받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간절함이 있을 때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꽃과 같습니다. 꽃에는 향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꿀이 있습니다. 그 때에 벌들이 날라듭니다. 

성도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벧전 5:10절 말씀에 보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는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 주님은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 고난 속에서도 굳세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은혜가 있어야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고통과 눈물, 아픔과 상처가 많은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어떻게 이방 땅에서 믿음과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단 1: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느 1:11절 말씀을 보면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때에 내가 왕의 술맡은 관원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갈망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다른 어떤 것보다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려주는 것입니다.


3. 사람은 잊었으나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23절).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꿈해석을 끝낸 요셉은 술관원장에게 자신을 기억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요셉은 한가닥의 희망을 가졌습니다. 혹시 그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하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출옥되고 난 뒤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기쁜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달이 지났습니다. 1년이 지나도 무소식입니다. 술맡은 관원장이 출옥한지 2년이 지났습니다. 

요셉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상상해 보세요. 배신감, 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구원이 결코 사람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의지하면 결국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셉의 감옥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시 105:18-19절을 보면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사람을 믿게되면 실망하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사람은 잊었으나 하나님은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120년간 열심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습니까? 일년이 아니고 120년입니다.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주를 짓고 7일 후에 비가 내렸습니다. 홍수가 났습니다. 물심판이 이루어집니다.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 8:1에서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라고 했습니다. ‘기억하다’는 뜻은 잊어버린 것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계속해서 돌본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은 믿을 수 있거나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랑하고 섬겨야할 대상이지 기대할 대상은 아닙니다. 순간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영원히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결국 실망하고 낙심되고 좌절합니다. 사랑했던 자녀도 어느 날 부모님 곁을 떠납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자식이 그럴 줄 몰랐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을 의심하라, 믿지 마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은 누구나 다 약합니다. 

사 2:22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생애 속에서 인간에게 쓰라린 배신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요셉이 형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보디발의 총애를 입은 요셉이 감옥에 들어갈 줄 생각했겠습니까? 술맡은 관원장이 자신을 잊어버릴 것을 생각했을까요? 요셉은 감옥에서 사람은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신다는 것을 철저히 배웠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되는 대상임을 깊이 이해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 사람이 우리를 잊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 27:10절에는 심지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 꿈의 해석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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