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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 (엡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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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 (엡 2:1-7)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His 그분 이라는 말과 Story 이야기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인류역사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기원(紀元)이라는 말은 연대를 계산하는 데에 기준이 되는 때를 말합니다. 새로운 출발이 되는 시대나 시기를 말합니다. 세계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때를 기준으로 해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눕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세계사를 기원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Before Christ라고 해서 약자로 B.C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의 시간을 A.D 라고 합니다. 이는 라탄어 Anno Domini 의 약자입니다. 라틴어 Anno는 영어로 After라는 뜻입니다. Domini는 영어로 Lord 라는 뜻입니다. 즉 Anno Domini는 왕 이후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올 해가 2012년도인데 A.D 2012년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 2012년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준으로 해서 세계의 역사가 나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오시기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로 구분이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역사를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똑똑하고 성공했을지라도 그의 결국은 멸망이라고 말씀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2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크게 두 문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3절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단은 4-7절입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변화된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들의 상태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기 전의 상태를 ‘죽었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구원 받기 전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입니다. 산송장입니다. 교회 밖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습니까?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습니까? 얼마나 성공한 사람이 많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죽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의미는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죽음의 특징을 2,3절에서 세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영적으로 죽은 자의 특징 가운데 첫 번째가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악인을 ‘바람에 나는 겨’에 의인을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에 비유합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바람이 불고 가뭄이 들어도 시냇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요동치지 않고 시절을 따라 푸르른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즉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삶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웠기 때문에 삶의 어떤 어려움에도 요동치지 않고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삽니다. 

반면에 바람에 나는 겨는 줏대가 없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날라 갑니다. 바람이 동쪽으로  불면 동쪽을, 서쪽으로 불면 서쪽으로 날라 갑니다. 그러다가 떨어지는 곳에서 썩어 없어집니다. 영적으로 죽은 악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과 행복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세상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의 다른 특징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사단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우두머리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향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죄책감도, 부담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사단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방해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의 마지막 특징은 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체’는 단순한 신체적인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성품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이고 교만한 성품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모든 결정의 근거가 자기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눠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가 말렸지만  작은 아들은 끝까지 자신의 재산을 나눠다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막무가내로 요구하자 할 수 없이 재산을 나눠줬습니다. 작은 아들은 그 돈을 가지고 도시로 나가 허랑방탕하게 썼습니다. 창녀들과 술집에서 놀아났습니다. 노름을 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 살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 돈이 있었을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었는데 돈이 다 떨어지고 나니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알거지가 된 작은 아들은 유대인들이 저주스러운 직업으로 여기는 돼지를 치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굶주린 배를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로 채웠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이라고 표현하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우리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본문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4절에는 본래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우리말에는 이것이 생략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입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통해 4절에서 7절의 말씀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허물과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린 힘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가 회복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부활됨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에서 살리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탕자의 비유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 달라고 해서 도시로 나가 타락한 삶을 살았던 아들이 바닥까지 떨어진 후에 후회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아들이 아닌 종으로라도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도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후에 하루도 빠짐없이 마을 어귀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언덕 위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작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다시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인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달려가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고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손가락에는 아들임을 상징하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종들에게 가장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모습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단의 지배를 아래’ 있었던 모습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의 모습이었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우리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앉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거지의 신분을 벗어 버리고 아들의 신분으로 다시 회복된 작은 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내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를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보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과 감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영적인 변화입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의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었다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이 영적인 축복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진정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의 자존감입니다.

믿음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건강과 질병, 부자와 가난, 성공과 실패, 높음과 낮음을 뛰어넘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 나라 백성 됨에 대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항상 기뻐할 수가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이 학교 성적, 대학진학, 취업 등과 관련해 그것과 관계없이 우리 자녀 됨을 감사하며 자존감 있는 자녀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자존감을 심어주는 부모 밑에 있는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 있고 자존감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갑니다. 저는 행복한 교회 목사로서 자존감 있는 목회자의 삶을 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존감 있는 행복한 교회 성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나의 구주로 믿은 이후에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성령님 안에서 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 변화가 우리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삶이 우리의 간증이 될 때 그 위에 하나님의 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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