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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라 (렘 28:3-4, 마 2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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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29회 베이징올림픽의 폐막식 때 “런던에서 만납시다”(See you in London) 라고 하면서 헤어졌습니다. 그 때는 까마득한 것 같더니 벌써 런던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각국의 선수들이 이제 다시 런던에서 닦은 기량을 겨루게 생겼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할 때마다 외치는 것은 근대 아테네 올림픽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올림픽이 상업화하고, 선의의 경쟁보다 돈에 좌우되기에 올림픽정신도 많이 퇴색된 것 같습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입니다. 흔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컬을 때 이 말을 씁니다. 코끼리나 호랑이도 죽을 때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 바로 자기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 자기의 본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도 죽을 때가 되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의 사고는 중심지향적 사고라고 합니다. 항상 가운데로 모이려고 하는 사고이며, 이런 사고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명절이 되면 귀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변경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운데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변경으로 흩어지는 본성을 가집니다. 이런 서양 사람들에게는 귀성이라는 것은 먼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8:21에는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먼 길을 떠나 삼촌의 집으로 갈 때 하나님께 하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집, 본향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심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심리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아버지와 친척의 본토를 떠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항상 본향을 그리워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라는 곳을 사서 그 곳의 굴을 가족 묘지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자 사라를 위하여 산 무덤이 막벨라굴입니다. 

창세기 49:30에는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라고 합니다. 창세기 49:31에는 사라를 막벨라에 장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레아, 야곱까지 다 막벨라굴에 장사지냈습니다. 야곱은 애급에서부터 막벨라까지 시체를 이동하여 장사를 지냈습니다. 요셉은 죽었을 때에 애급에 장사지내지 않고 출애급 때 유골을 가지고 나와서 세겜이란 곳에 장사지냈습니다(수 24:32). 사람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져 둘이서 무너진 마음을 안고 어디론가 갑니다. 그런데 남자가 그 곳에 가면 여자도 저 멀리 그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바닷가이기도 하고, 한강변이기도 합니다. 그 곳은 그들의 추억을 심어놓은 곳입니다. 추억이 있는 곳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갈릴리에 가면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의 사랑을 심어 놓으신 곳입니다. 성지에 가보면 예루살렘은 복잡하고 장사꾼들이 우글거립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계실만한 자리가 아닙니다. 갈릴리에 가면 조용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흔적들이 보입니다. 
  
마태복음 2:23에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이 죽이려고 하는 위협을 피하여 애급에 가셨다가 다시 피난에서 돌아오셔서 나사렛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갈릴리에서 보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부활의 주님을 갈릴리의 주님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역에서 부활을 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4:23에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행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행적들을 부활에서 봐야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는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시골 동네 출신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나다나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시각이 그랬습니다. 나사렛은 비록 시골이었고 천한 곳이었지만 그러나 그 곳은 스승의 삶과, 말씀과, 정신과, 사랑과, 3년의 삶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과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빛 아래서 다시 그 모든 갈릴리에서의 행적을 보아야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재자들을 갈릴리에서 보리라고 하셨을까요? 예루살렘은 정치와 경제의 도시입니다. 대도시인 예루살렘은 죽음의 도시입니다. 갈릴리는 순수한 서민의 도시입니다. 생명의 도시입니다. 갈릴리는 첫째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이 좇아간 곳입니다. 제자들이 인생의 비전을 본 곳입니다. 둘째는 말씀과 기적을 행하시고 본 곳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발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말씀을 음미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기적을 다시 한 번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급의 감격과 감사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찬송의 마지막 절이 끝나기도 전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투정하였습니다. 다시 출애급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은총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기적을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유월절에 죽음의 신이 우리 집을 피해 간 사건을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5장에는 야곱이 가정적 환난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인 디나의 오빠들은 거룩한 예식인 할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했습니다. 이 때 야곱은 온 가족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 선포합니다.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고 진퇴양난을 맞이하고, 가정적 신앙적 위기를 만났을 때에 오래 전 하나님께서 언약을 베푸신 벧엘로 올라가 활기를 찾으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실패하고 좌절하고 울적할 때마다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의 고향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행전 3:15에 보면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10에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고 합니다. 사도의 자격 가운데 하나는 부활의 목격입니다. 사도는 부활의 목격자입니다. 부활을 보고 믿는 사람이 복음을 증거할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4에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이라는 가정의 말씀이 나옵니다. 부활이 없다면 말씀도 기적도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도의 역할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시는 것도,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하는 베드로도 그 참 뜻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들을 알게 된 때는 부활 이전이 아니라 이후였습니다. 성령강림 이후에 영적인 눈을 가지고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내가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도 그 때는 몰랐는데 부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모든 말씀들을 부활 후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무 공예가들은 ‘주목’은 살아서 천년을 살고, 죽어서 천년을 산다고 합니다. 생주목 뿐만 아니라 고사목이 되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서 사랑이셨고, 죽어서 구원자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작아 보여도 지방마다 지질과 공기가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매주를 띄울 때 곰팡이가 다 다르답니다. 그래서 지방마다 장맛이 다르다고 합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과는 전혀 다릅니다. 풍토가 다르고 맛이 다릅니다. 예루살렘에서 알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갈릴리에서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갈릴리에서 제 맛이 납니다. 갈릴리 없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대로 맛을 알 수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비로소 맛을 내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고쳤지만 한 때 강화수양관의 피뢰침이 고장 났습니다. 피뢰침이 벼락을 맞아 부서졌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요? 피뢰침은 번갯불을 잡아 땅속에 흘러 보내 다른 데로 벼락을 안 맞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뢰침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보고 갈릴리의 말씀들을 다시 생각하고 힘을 내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완전 실망하고 좌절하여 마치 벼락 맞은 피뢰침처럼 변한 제자들을 갈릴리에 모이게 하시고 갈릴리에서 다시 희망을 가지고 사도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과거에서 미래를 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8:10에는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합니다. 갈릴리 출신들인 제자들이었지만 갈릴리는 제자들의 사역의 중심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역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이나 비전을 갈릴리에서 세계를 봐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비전과 미래를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거의 갈릴리에 계신 듯합니다. 그러나 승천하실 때는 다시 예루살렘에 오셔서 감람원이란 산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12에는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갈릴리와 온 유대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 하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셨습니다. 가나 사람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고 따르게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세리 마태를 취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 그 감격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전하시던 말씀과 기적의 흥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빛 아래서 미래를 보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문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기대감과 으스대던 때를 생각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절망하던 때를 잊지 말고, 이제 부활의 소망으로 세계를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글로벌화를 요구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제한된 복음이 아니라 땅 끝까지 확산되어야 할 복음의 세계화를 요구하십니다. 유대의 것을 세계적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갈릴리의 복음을 땅 끝까지의 복음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거의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대부분 갈릴리에 제한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복음전파의 실습도 갈릴리에서 행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신 것은 갈릴리 중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14에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하십니다. 갈릴리에서 제자 삼으시고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됨은 갈릴리 중심입니다. 그런데 사도됨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4에는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사도가 된 다음, 사도들의 활동은 예루살렘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후에는 더 이상 제자가 아니라 사도입니다. 갈릴리에서는 배우는 자이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보냄을 받은 자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마세테스’ 아니라 ‘아포스톨로스’입니다. 갈릴리로 와서 제자로서 최후의 복습을 하고 사도로서 세계로 나가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보게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안디옥을 보게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땅 끝을 보게 하셨습니다. 복음으로 세계화의 눈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연상’(association)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연상을 기초로 한 말입니다. 입덧할 때 입던 옷을 입으면 괜히 구역질이 나는 것도 연상입니다. 본래의 장소에 가면 그 때 감정이 되살아나는 심리현상이 연상입니다. 갈릴리라는 과거 장소에서 말씀과 기적을 보고, 미래를 계획하고, 복음전파를 설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결혼 후 프로그램에는 신혼여행지에 함께 다시 가기, 혼인서약 다시 보기 등이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하여 결혼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고 첫사랑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직분을 받기 위해 안수를 받을 때에 서약을 다시 돌아보는 것도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새기는데 필요한 일입니다. 갈릴리에 와서 첫 소명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N-Virus’라는 말이 있습니다. ‘N’은 ‘Need’ 즉 필요, 요구, 욕구를 의미합니다. 어느 공동체가 “우리는 희망이 없다”, “다시 일어서기 불가능하다”라고 부정적, 비관적으로 생각할 때 이 바이러스는 나타납니다. 이런 와중에 “아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라는 주장을 계속 퍼뜨립니다. 그러면 부정적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긍정적 생각에 감염되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희망이 있어”. “Yes, we can!”이라고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이것을 ‘N-virus’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희망 바이러스’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다시 당당하게 만들고, 희망을 주고, 처음 사랑을 회상할 수 있는 ‘N-virus’였습니다. 갈릴리가 없으면 예루살렘도 없고, 땅 끝도 없습니다. 

  
결론 

미국의 카네기공대 졸업생들을 추적하여 조사한 결과, 이구동성으로 “인간이 성공하는 데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 관계였다”고 하였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3가지 ‘방문’을 잘 하였습니다. 첫째는 ‘입의 방문’입니다. 칭찬이나 용기를 주는 일입니다. 둘째는 ‘손의 방문’입니다. 편지를 쓰고 메일을 보내는 것입니다. 셋째는 ‘발의 방문’입니다. 병문안이나 어려움 발품을 잘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방문을 잘하는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를 다시 방문하여 예수님의 입과 손과 발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과 손과 발을 보고, 사도들 자신의 입과 손과 발을 다시 잘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갈릴리로 갑시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갈릴리에 가면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갈릴리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은혜에 잠기고, 말씀으로 감격하고, 성령을 체험한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낙심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침체기가 있습니다. 이 때 갈릴리로 가서 새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갈릴리에 가면 주님이 먼저 와 계십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를 만나면 하늘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 일어납시다.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미래를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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