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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로암의 환희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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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의 환희 (요 9:1-12)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기적과 감동의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여사를 아십니까? 이 헬렌 켈러가 쓴 수필 ‘내가 만일 3일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지는 이 글을 20세기 인류가 쓴 가장 위대한 에세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지요.?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3일을 주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나처럼 볼 수 없고 눈먼 채로 살도록 하고. 또 하루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로 살고, 마지막 하루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살게 한다면 감사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한 번만 저 무지개를 볼 수가 있다면, 내가 단 한번만 저 떨어지는 낙엽의 아름다움을 볼 수만 있다면, 단 한번만 이 산 속에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저에게 용기와 끊임없는 가르침을 베풀었던 설리반 선생님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내 눈으로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나에게 이 귀한 설교의 감동을 주었던 필립 부룩스 목사님의 그 얼굴을 단 한번만 볼 수가 있다면, 내 인생, 내 삶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던 감동스러운 이 성경을 내가, 내가 단 한번만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누군가가 평범한 사람이 갖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또 그것이 살아가는 데 자신의 삶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고통이라면 얼마나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이 장애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애인하면 선천적 장애인을 연상하지만 장애인중 선천적 장애인은 20%미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산업화되면서 더욱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결과로 산업 재해, 교통사고, 약물 복용 노인성 질환들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많은 후천적 장애인들을 양산하는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 인구의 10%는 장애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통계는 오늘 날 인구 고령화의 추세로 훨씬 더 증가 추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통계는 앞으로 20년후 에는 인구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우리 모두가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인으로 일생의 한 시기를 살다가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비 장애인의 범주에서 예외 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13일이 국가적으로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교회도 이번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한 시각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장애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장애인 사랑-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1.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시다가 지나치는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2절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부모니이까” 우선 우리는 이전 제자들의 질문의 밑바닥에 뿌리박고 있는 그들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편견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1절에 보면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나이가 몇인지 모르지만, 성인인 점을 감안하면 꽤나 긴 세월동안 고통을 당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눈앞이 안 보여서 육신적으로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늘 남의 신세를 져야 합니다. 생활도 구걸해서 겨우 연명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또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차별과 천대를 당했겠습니까? 

여기 제자들이 던진 질문‘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역시 당시 제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사회가 바라보는 엄청난 편견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장애나 질병을 무조건 죄의 결과로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다 그런 게 아닙니다. 구약에 나오는 욥 같은 사람은 동방의 의인이지만 그래도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함부로 정죄하면 곤란합니다. 

3절에 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을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편견의 잣대를 가지고 달려들었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이 사람의 경우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오히려 그 장애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고 영광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정말 그렇게 됐습니다. 성경에까지 기록되어 대대로 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나 역사 속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한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아름답게 드러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각장애인의 경우를 예로 들면, 존 밀턴은 그가 남긴 작품 중「실낙원」등 고전 중의 고전은 그가 실명한 후에 쓴 것입니다. 시력은 잃었지만 더욱 깊어진 신앙에서 스며나온 위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장애인 출신 하버드 박사 헬렌 켈러는 시각 장애뿐 아니라 청각 장애, 언어 장애 등 3중 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세계적인 교육가요 위대한 신앙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튼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엄청난 천대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겨운 고통입니다. 요즘에도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암암리에 그런 차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말리아 나라에서는 아예 인구 조사할 때 넣어주지도 않고 호적도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각장애인을 낳은 부모는 죄인 취급을 받아 숨을 죽이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당시에는 장애인이 성전에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가 마음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구원의 은총을 찬송하는데, 거기서 소외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단지 앞이 보이지 않는 육신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이로 인해 영적인 고통까지 당하는 이중적인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정말 그 사람의 인생은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2. 주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편견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아니하셨습니다. 4절을 읽어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여기 ‘나를 보내신 이의 일’ 이를 우리는 미tus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션(Mission)이란 단어는 본래 ‘보냄 받았다’는 라틴어 단어 ‘missi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미tus을 “우리를 보내신 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가 하여야 할일”이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가장 큰 미숀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위대한 명령 혹은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명령 못지않게 우리가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명령을 가르쳐 우리는 위대한 계명 혹은 가장 큰 계명(Great Commandment)이라고 합니다. 이 위대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작은 자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토요일마다 장애우 예배- 실로암 대학을 여는 이유입니다. 

갈2:7-8에 보면 바울 사도는 베드로에게 주께서 그의 동족인 유대인 복음 전도를 맡기신 것 같이 나에게는 이방인 복음 전도를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는 바울 사도의 사명의 우선순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갈2:10에 보면 복음 전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가져야 할 또 하나의 관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보편적인 습관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작은 자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은 구약에서부터의 일관성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레19:13-14을 읽어 보십시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작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작은 자들을 보호하고 아끼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의 실천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태 25장 최후의 심판의 장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심판하시는 그날-그분은 작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심판의 준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날 그분 앞에서 우리가 받게 될 이런 질문들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는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내가 주리고 목마를 때에 너희는 내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 일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앞을 보지 못하고 길을 헤맬 때 나를 도운 일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몸이 불편한 내가 먼저 타도록 배려한 일이 있느냐?” “너희는 몸이 불편한 내가 주차장에 먼저 차를 주차하도록 장애인 주차장 공간의 의미를 존중하고 그 자리에 불법 주차하지 않도록 늘 질서를 지켰느냐?” 우리 중에는 틀림없이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셨고 언제 길을 헤메이셨으며 언제 몸이 불편하신 일이 계셨습니까?”라고 말하실 것입니다. 주님 다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맞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작은 자 사랑-그것은 주님의 사명이요, 주님의 제자 된 여러분과 저의 사명임을 잊지 마십시다. 

3. 자! 주님은 이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이 사람을 치료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6-7절을 보십시요.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그런데 이 고침 속에는 섬세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중에 더러는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서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방법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위로 도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위의 도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께서 여러 유형의 병자들을 만나 치유하시는데 그는 결코 동일한 방법을 일률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만으로 고치시고 어떤 사람은 안수하셔서 고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고치시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두고 치유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면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그의 영적 필요를 다루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에 대해서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로 눈을 씻으라고 처방하십니다. 아마도 이 맹인은 자신의 눈에 차가운 물기 섞은 진흙이 발라지고 그리고 그의 눈에 다시 연못의 물로 그 진흙이 씻겨질 때 구체적으로 자기 눈에 주님의 터치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이제 내 눈에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 날 것을 믿음으로 기대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접근하시고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실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방법으로 도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만 하시면 고칠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도울지 모르면 솔직하게 질문하십시오. “어떻게 도와 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도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등장한 소경을 보게 하신 다음 주님은 마침내 그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를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가 눈을 뜨자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다들 야단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종파이며 정파인 바리새파 사람들, 서기관 등 기득권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기� 맛�질서가 흔들릴까봐 심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아예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제명출교를 시킨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신앙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생존권이 박탈되는 것입니다. 소경되었던 그 사람은 그런 핍박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증거합니다. 17절에 보십시오. “(예수님은) 선지자니이다.” 예수님을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었다고 해서 죄인으로 정죄하고 몰아붙이지만 그는 뭐라고 증거합니까? 25절에 보시면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32절~33절에 보면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나중에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는 주님 앞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한생을 절망과 사회로부터 철저한 버림을 받고 산 이 장애인의 삶은 더 이상 상처를 안고 살지 않습니다. 이젠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기 - 바로 내 인생에게 다가 오셔서 내 인생을 사람답게 만든 그는 환희에 찬 감격을 토해 놓습니다. -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는 육신의 눈만 고쳐진게 아닙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떠진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영적인 눈이 떠집니다. 영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것이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인생의 비참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절망과 좌절과 고통 속에 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기를 출교하겠다고까지 협박한 그들을 향해 당당하게 외칩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이제 그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환희에 찬 인생으로 바뀝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오늘 이 실로암- 보냄을 받았다는 이곳으로 절망의 발걸음을 내딛던 그는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평생 자신을 짓누르던 장애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는 육안만 열린 것이 아니라 영안까지 열린 새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영적인 눈이 감겨진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고, 무지와 교만 중에 있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낫 놓고 ㄱ자를 모르듯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41절에 보세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소경이란 말씀입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게 뜨고 있지만, 영적인 눈은 어둠 속에 감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멸망할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나고 참 신앙인이라면 영적인 눈이 떠져야 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외양과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진리에 눈먼 자들이 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참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우리는 진리에 눈 떠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에 눈 뜨고, 더 나아가 인생에 눈 뜨고, 사랑과 사명에 눈을 떠서 비로소 행복한 인생, 더 나아가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가슴 아파야 할 것은 육신은 멀쩡해도 영적인 장애를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인생입니까? 육신의 눈은 멀쩡하지만 눈뜬 소경, 영적 소경으로 살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만나 영적인 눈을 떴습니까? 잘 점검해 보십시오. 구원에 눈을 떠 천국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눈을 떠 사랑하고 섬기고 주의 복음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만 뜬 자가 아니라 영 적인 눈을 크게 뜨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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