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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 (벧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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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 (벧전 1:3-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 민족의 부활절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곡우 절기가 가까워오면서 완연한 봄날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 우리 교회의 신앙 실천은 새싹이나 꽃을 하루에 10분 이상 바라보며 묵상하기였습니다. 잘 실천하셨는지요? 꽃과 나무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피어나는 꽃을 보며 ‘대지가 터뜨리는 웃음’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 바치는 찬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기가 막힌 데 어떻게 한가하게 꽃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고단한 현실을 이겨낼 힘을 그 속에 담아두셨는지도 모릅니다. 

벌써 양지 바른 산비탈마다 진달래가 피어나고 있습니다. 진달래 하면 잊을 수 없는 게 이영도의 노래 시 <진달래>입니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이맘때면 이 노래가 입 끝에 맴돌곤 합니다. 비장함이 느껴지는 이 노래는 사실 4.19 혁명 때 스러져간 젊은 넋들을 기리는 노래입니다. 이제 나흘 후면 4.19혁명 52주년이 됩니다. 그날 185인의 젊은이들이 민주주의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몸을 불살라 바쳤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사적인 이익이나 당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 민주, 평등, 정의,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일어난 그 날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나 민중운동사에서 영원히 망각될 수 없는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날을 민족의 부활절이라고도 말합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잠시 동안은 몸을 굽히는 듯 보이지만 다음 순간 어김없이 몸을 일으키는 풀들처럼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깃든 사람다운 삶의 꿈은 결코 스러질 수 없다는 사실을 4.19혁명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입니다. 그 아름답고 멋진 역사의 꿈은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4.19혁명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어 지금도 우리들 속에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습니다.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의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우는’ 치열함이 사라지지 않은 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 야만의 시간에도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시간, 세상은 흑암과 절망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의와 진리와 사랑과 선이 잦아들고, 악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 쾅쾅 쳐 못을 박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사는 사람들,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대못이 박혔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한껏 조롱하던 이들은 강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용렬함과 비겁함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 어둠의 시간, 야만의 시간에도 주님은 당신께 맡겨진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저는 이 말씀에 감동하고 또 감동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폭력과 미움과 비겁함과 무지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할 때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마지막 연이 떠오릅니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은 한반도에서 모든 전쟁 무기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절절한 평화의 염원을 담고 있는 ‘흙가슴’이라는 표현이 이채롭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품에 안아 기어이 정화시키고야 마는 흙을 닮은 마음이 바로 흙가슴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야말로 흙가슴입니다. 어느 날 외국 기자가 장일순 선생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최성현 엮음, <좁쌀 한 알>, 156-7쪽 요약)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대해 분노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가르고,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길이 아닙니다. 불의에 치열하게 저항하면서 정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미움과 증오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늘 군대를 동원하여 원수를 없애기보다는 당신의 몸으로 세상의 어둠을 받아들여 빛으로 바꾸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혁명입니다. 어리석어 보이고, 너무나 더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야 말로 생명의 길이고 평화의 길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릅니다. 

“자기의 몸을 신에게 바친 사람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진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 새로 태어난다는 것

십자가의 길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산 소망’(a living hope)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산’ 소망은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피어났다가 시들어 버리고, 젊음 또한 그렇습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도 한 여름 밤의 꿈처럼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잡았다 싶은 순간부터 우리를 배신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시간 여행자인 우리는 늘 목마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어 전전긍긍합니다. 대다수의 도시 직장인들은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을 향해 질주합니다. 어느 날 그 꿈을 이루면 행복할까요? 잠시 동안은 그럴 겁니다. 하지만 또 다른 욕망이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욕망은 영원한 목마름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은 언제 들어도 참 적실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전4:4)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전5:10)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소망,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름답고 신선해지는 소망이 있을까요? 베드로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번 서울 연회에서 45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보좌하면서 마음이 아뜩해졌습니다. 김기택 감독님께서 안수를 받은 이들의 목에 붉은색 스톨(領帶)를 걸어주신 후에 꼭 안아주면서 ‘좋은 목사 되세요’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 따뜻한 격려가 제 마음에도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왜 스톨을 걸어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직을 수행하는 사람의 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심층적인 의미는 멍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안수 받는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견했습니다. 안쓰러움은 저들이 겪어내야 할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었고, 대견함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향해 나아가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하고 찬송할 때 저는 저절로 기도의 심정이 되어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능력으로 보호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구원의 빛을 보며 흔들림 없이 걷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소망을 붙들고 살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산 소망인 것이 분명합니까? 그렇다면 현실이 힘겹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현실이 어둡다고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 기뻐하라

베드로는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6)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능욕받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다며 감격하고 있습니다(빌1:29).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1:21)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굳게 붙든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다가 겪는 시련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우리 믿음을 단련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 믿음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이끌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해줍니다. 조선시대의 학자인 이덕무는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리산에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 위로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에 비칩니다. 못에는 물고기가 있는데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처럼 보였기에 사람들은 그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고 합니다. 잡기는 어려운 데, 일단 잡아 삶아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전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 송영변어松影變魚입니다. 소나무 그림자가 물고기 무늬로 변했다는 것이지요. 

참 절묘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해봅니다. 예수의 그늘 아래 오래 머물다 보면 우리에게도 무늬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렸다 마음 내키지 않으면 지우는 그림이 아니라,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무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알아볼 무늬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요13:3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8)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무기력해 보입니다. 거짓과 악의와 추함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땅 속에 묻힌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고, 짓눌렸던 선함은 반드시 솟아오를 것이고, 외면당하고 있던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물들이게 될 날은 반드시 옵니다. 진달래꽃만 보아도 4.19가 떠오르고,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부활이 떠오르는 데 어떻게 우리가 낙심할 수 있겠습니까. 

힘을 내십시오.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답게,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하십시오.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우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십시오.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을 안아 일으키십시오. 흙가슴으로 세상의 날카로운 것들을 품어 녹여버리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니 할 수 있습니다. 이 척박한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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