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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믿음 (요 5: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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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믿음 (요 5:17-29)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을 다 지으신 다음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힘써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가정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또 다른 복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수고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것이 복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정과 교회와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 왜 아픔이 있습니까? 왜 교회 안에 다툼이 있고 시기와 질투와 비판과 원망이 있습니까? 어째서 일하는 것이 즐겁지가 않고 힘든 것입니까? 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가 하나님께서 인생의 복으로 주신 것들을 변질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1955년 어느 가을 미국 오리건 주 유게네라는 마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날 그곳의 신문에는 마을 회관에서 종교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났습니다. 그 중에 한 농부 부부도 참석했습니다. 그날의 영화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생긴 고아들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 결론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참석했던 그 농부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가난한 농부야. 우리 같은 농부가 무엇을 할 수 있을라고” 하는 자탄을 하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날의 가슴 아픈 영화 장면들이 선명하게 기억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기도하는 가운데 이윽고 농장의 일부를 팔고 직접 한국에까지 와서 8명의 혼혈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마을 신문에 사진과 함께 기사로 나가자 각 곳에서 그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고, 어떤 가정에서는 그런 혼혈 고아를 양자로 맡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농부는 차츰 농토를 팔고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부부는 1만 6천여 명의 전쟁고아를 각 가정에 맺어주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유명한 홀트양자회 주인공인 해리 홀트 씨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고 하며 겸손히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일을 맡겨주신다는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지혜라든가 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 가운데 시작하는 일에 하나님은 지혜도 돈도 풍성히 주시게 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이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데스다 못가를 찾으신 주님은 그곳 행각에 누워 있던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십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 사람이 대답하자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놀라운 일은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래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한다고 해서 예수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온 세상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다 지으셨는데 무슨 일을 하나님께서 또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말씀으로 온 세상을 지으신 그 분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왜 그분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다시 말해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권세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문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제 사람들에게 죽음이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인간의 욕심이, 인간의 교만이 영생토록 살 수 있었던 존재에서 반드시 죽는 인생으로 바뀌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살 길을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제물로 드림으로 그 생명으로 죗값을 대신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주님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목숨으로 우리를 대신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우리 영혼과 심령에 뿌려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우리 마음에 믿음을 허락하시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오늘까지 하시는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도록 유혹한 뱀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셔서 이때 벌써 사람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주님 자신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실 뿐 아니라 또 우리를 보내셔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도록 하셔서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전하도록 하고 그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을 믿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역시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죽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예수님의 수고는 죽기 위한 준비였던 셈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왕 중 왕이 되시는 그분께서 낮고 천한 외양간에서 삶을 시작한 것부터가 모든 사람을 위한 십자가를 완성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막 10:45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막 2:17에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요 14:2에서 또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처음부터 섬기기 위해서 오신 주님이시오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오 다시 살아나신 다음 40일 만에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이유 역시 우리를 위한 거처를 준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일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심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육신만을 고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주님이 더 관심을 가지신 것은 그 영혼의 구원이셨습니다. 그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고 가서 다시는 죄는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곤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가 죄 때문에 시작되었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근본적으로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는 말씀은 그러니까 나는 그 일을 위해서 죽는다는 뜻도 됩니다.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사람들 역시 죄로 말미암아 죽고 믿음 안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일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세상에 왔습니까? 우리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일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그대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닌 기쁘게 일을 하다가 일이 끝나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마지막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먹고 사는데 매여 있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또한 주 안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수고가 단순히 힘겹게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한다면 어떤 일을 해도 우리는 즐거움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일이라는 것이 재미있어야 하고 쉬워야 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면 이건 노동입니다. 어려운 것을 억지로 한다면 이것은 노동에 불과합니다. 또 괴로워도 슬퍼도 어쩔 수가 없어서 안 할 수가 없어서 한다면 이것 역시 노동에 불과합니다. 
일은 즐거운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노동하는 것은 시간이 가지를 않고 괴롭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합니까? 섬기기를 기뻐하고 봉사하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찬송가의 노랫말처럼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 은혜 고맙고 놀라워라” 하는 감격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하며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에 오히려 섬길 수 있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자 일한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아픈 몸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 괴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가 되는 것이요 그래서 감사 찬송하며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엡 6:6~7은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다시 돌아가 오늘 본문의 배경인 베데스다 못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가 고침 받을 것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은 전혀 관심 밖입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베데스다에 모여 있지만 누구하나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제치고 내가 제일 먼저 내려갈까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경쟁자일 뿐입니다. 

그래 서로 먼저 내려가려고 밀치고 댕기다 보면 다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치고 받고 싸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만들어 놓고 내가 고침을 받는다고 한들 살아가는 내내 그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며 일하게 하셨다는 것은 기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즐거운 마음으로 주께 하듯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일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셔서 순간순간 우리를 감동하시고 깨우쳐 주십니다. 아울러 그런 우리로 하여금 죽어가는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따라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나도 주와 함께 일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섬김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한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더욱 예수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뿐만 아니라 네 자리를 들고 돌아가라고 하심으로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니 이게 어찌 말이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아들 예수님도 하시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 예수님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살리기를 원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를 주님이 살리시는데 그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이미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이 세상에 오셨고 이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 지금까지도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은 사셨고 일하셨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죽으셨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서 우리들에게 덮어 씌웠던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쏘는 것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무엇입니까?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풀려 자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죗값을 치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하나님의 속죄소 위에 시은좌 위에 뿌려졌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에게는 더 이상 죄의 저주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받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에 사망의 쏘는 것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 안에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우리는 이미 선한 일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감사했습니다. 그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으심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 예수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우리 역시 주님의 길을 기쁨으로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의 어린 양들을 돌보며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령으로 오늘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는 일에 우리 모두 마음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돌아보는 아름다운 섬김과 수고하는 즐거움이 우리들 가운데 날마다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승객이 호화로운 배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심한 폭풍 속에서 새까만 어둠 속을 질주하는 동안 그는 배 멀미 때문에 선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라운 외마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참 불쌍한 사람이군”하며 이 사람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있다면 도울 수 있을 텐데. 아무 것도 할 게 없잖은가.” 
그때 그는 어떤 작은 음성을 마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선창에서 간데라를 비춰주면 불빛을 보고 배로 돌아오는 방향을 알지도 몰라” 

이 사람은 곧 행동에 옮겼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물에 빠진 사람이 구출되었습니다. 선장이 이 사람의 방에 들어와서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간데라의 불빛이 선창으로부터 비춰 깜깜한 바다에서 그를 발견하고 구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큰 일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중요합니다. 당신의 작은 섬김이 귀중한 영혼들을 구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출발점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여 예수를 믿은 믿음 안에서 영생을 얻은 자로서 다른 생명을 건져 구원하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섬김의 사람 사랑의 사람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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