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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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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23)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주님은 유대인의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고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잠그고 모여 있는 그들 앞에 나타나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너무 기뻤지만 믿기 어려워 기이히 여기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시며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날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거기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 제자들의 말에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후 도마와 제자들이 집안에 있을 때 예수님은 지난 번처럼 문이 닫힌 방안에 다시 찾아오셨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며 문안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심을 확인한 도마는 즉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은 자들은 복되도다’  결정적인 증거를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숱한데 도마처럼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의심을 거두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믿음, 복된 믿음은 내 눈으로 못 보았지만 증인들의 말을 듣고 믿는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은 이렇게 눈으로 보고서야 비로소 믿어지는 믿음이었습니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제자들조차 주님의 부활을 쉽게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만큼 끔찍한 형벌이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판단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이라 해도 다시는 회생할 수 없는 분명한 죽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의 결과로 당하는 사망은 이처럼 끔찍하고 다시는 소망을 가질 수 없는 비참한 형벌입니다. 죽음의 모양이 다를 뿐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죽음이라는 형벌을 피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은 인간의 한계성 앞에 굴복하고 모든 희망을 접은 채 뼈에 사무치는 두려움으로 떨며 숨어있던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께서 유령처럼 등장했으니 거기 열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모였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일들이 다 지난 후 그때 두려움으로 떨었고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자신들의 행동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믿음 없는 자신들을 보신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답답하셨고 실망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옛날의 자신들처럼 믿음이 없고 방황하는 후배들의 약한 믿음을 돕기 위해 글로 남겼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함께 먹고 마시며 전도여행을 다닌 사람들이 아닙니다.  팔레스틴 땅에 사는 유대인도 아니고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아시아 지역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주님 말씀처럼 이 사람들이야말로 복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사람들이 제자들보다 훨씬 복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믿음이 신기하고 부러워 칭찬하며 축복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같은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2천년 전에 유대 땅에 사람으로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을 눈으로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거나 하시는 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간적 지리적 간격이 엄청나게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들이 기록된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처음 받았던 사람들은 그래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분들에게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래도 한치 걸러 들은 사람들보다는 산 증인들의 말이 더 믿음직스럽고 강력한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우리는 벌써 2천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근거로 믿게 되었으니 어쩌면 기독교 초기의 성도들보다 더 좋은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정말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내 안에,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 시대 성도들은 보지 못한 예수를 사랑하였고 믿었으며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였다 했는데, 오늘날 우리들도 과연 이런 믿음과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이런 즐거움과 기쁨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복 누리시기 바랍니다.      

의심 많은 도마까지 모두 함께 모인 자리에 찾아오시고 부활을 확인해주신 것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두번째 공식 방문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시몬 베드로를 포함한7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 나이가 가장 많은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간다’ 하자 우리도 가겠다 하며 우르르 따라 나섰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던 제자들이지만 아직 혼란스런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심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였던 그 시절로 돌려 보낸다는 말씀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그 동료들을 처음 부르실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셨고 제자로 불러 어느새 3년이 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베드로는 물론 모든 제자들이 의기소침해졌고 삶의 목표를 잃은 사람들처럼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실 때마다 평강을 선포하신 것은 그만큼 제자들의 심리상태가 불안하였음을 반증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뵈었으면 이제 마음을 추스리고 기운을 내었으면 좋았을텐데 예수님이 이전처럼 곁에 계시지 않으니 아직 허전하였고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도 안계신 예루살렘에 언제까지 눌러 지낼 수도 없었고 또 무엇인가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왔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버려두었던 배와 그물을 다시 챙겨가지고 옛날처럼 물고기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것만이 베드로와 친구들이 마음을 달랠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친구들이었다면 그 사람들보다는 좀더 나은 모습을 보였을까요?    

밤새 그물을 던지며 수고하였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밤이 지나고 날이 새어갈 때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3년 전에 갈릴리 호수에서 처음 경험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때도 주님은 밤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지쳐있는 그들에게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에 가득 찰만큼 물고기를 잡게 해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역시 주님이 하라고 하신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잡힌 고기가 많아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묵직하게 끌려 올라오는 그물의 무게를 손 끝으로 느끼는 순간 예수님이 찾아오신 줄 깨달은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알렸고 베드로는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어 호숫가에 계신 주님을 뵈러 갔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육지로 헤엄을 치며 나가는 베드로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상상해봅니다.  내가 처음 만났던 주님, 지난 세월동안 나와 함께 하셨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신데 내가 어찌 이처럼 못난이가 되어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었는가?   주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갈릴리 호수의 모든 물고기를 내 그물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분인데 왜 내가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도 모르고 또 다시 옛날로 돌아와 그물을 던지고 있는가?   나에게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고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가슴이 뛰었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나는 또 다시 옛사람의 모양으로 돌아와버렸구나. 내가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동안 갈릴리 어부보다는 훨씬 더 멋지고 화려하며 힘 있는 성공자가 되보겠다고 주님을 따라다녔구나.  내가 주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하며 애통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헤엄쳐 갔을 겁니다.   

육지로 올라온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호숫가에는 숯불이 펴있고 떡과 생선이 그 위에 올려 있었습니다.  밤새 찬 바람을 맞으며 고생했던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예수님의 아침 식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본 따뜻함입니까?   밤새 얼었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그동안 주님 안계실 때 가졌던 두려움과 설움이 일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새삼 깊이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다시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늘 함께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와서 아침 먹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아무도 ‘당신이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앞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오늘 본문을 읽는 독자들을 갈릴리 호숫가로 초청하여  제자들이 둘러 앉은 틈에 앉힙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아무개야, 네가 여기 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꾸물거리지 않고 얼른 대답합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주님께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열길 물속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주님이 제 마음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지난 번에는 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그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때의 부끄러운 일을 꼭 변명해야지 하며 기회를 기다렸는데 마침 이때라는 듯 주님께 마음을 열어보입니다. 전처럼 큰 소리하며 ‘당연히 사랑하지요’ 하는 식의 대답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나 지금의 내 솔직한 심정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하는 겸손한 고백이며 지난 일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재차 또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두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마음이  뜨끔했을 겁니다.  내 대답이 좀 약했나?   주님이 아직 내가 못 미더우신가보다 생각하고 이번에는 좀더 힘을 주어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때 주님은 ‘내 양을 치라’ 하십니다.   그리고 똑같은 말로 세 번째 또 물으십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아, 삼세판인가보다’ 생각하고 씩 웃으며 편안하게 대답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민망하고 죄스러운데 다른 제자들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시려는가? ‘내 마음 주님이 다 아십니다’했으면 알아주셔야지 뭘 또 물으시는가? 하고  짜증이라도 내겠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는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빈정거림이나 꾸중하시는 음성이 아니라 너무나 간절하고 진지한 태도로 질문하시니 베드로의 마음은 갈수록 무겁고 근심이 됩니다. 세 번째 질문을 하시는구나!   세 번! 이라는 숫자가 마음에 걸립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있을 때 사람들 눈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말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는 듯합니다.   어디 숨을 곳이 있으면 달아나고 싶었을 겁니다.   다른 제자들의 눈이 모두 베드로의 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물음에 베드로는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는 말을 덧붙여 같은 내용으로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에게는 이 말 밖에 더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열 번을 물으신다 해도 똑같은 대답을 드릴 작정이었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더 이상 무엇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라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는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있을 때마다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으로 그의 사랑고백을 받아주셨습니다.   ‘정말이냐?  믿을 수 있을까?’ 하시거나 ‘그래, 알았다. 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안다’는 말로 받으시는 대신 베드로에게 양들을 부탁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의 할 일이 있다.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나의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혹은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 묻습니다.  ‘자기 날 사랑해’ 거의 대부분 아내가 남편에게 코먹은 소리로 묻지만, 어쩌다 한 번 무뚝뚝한 남편이 아내에게 툭 던져보는 질문입니다.  ‘응 사랑해’ 하면 또 묻습니다 ‘정말로 날 사랑해?’ 자꾸 똑같은 질문을 하면 그때마다 기분좋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왜 자꾸 똑같은 질문을 해!’ ‘그래, 사랑한댔잖아’ 하고 쏘아부쳐 분위기를 깨는 멋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셨던 분이십니다.   목숨을 다바쳐 사랑하신 그분께 베드로가 대답할 말은 ‘주님이 제 마음을 다 아십니다’ 였습니다.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이 세 번씩 같은 질문을  하신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 배신할까봐 못미더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회개하고 자숙하는 베드로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시며 또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양들을 위해 베드로에게도 같은 사랑을 가지고 나의 양들을 돌보라 하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하며 대답했던 것처럼 주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난 날 보였던 연약함과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 얼마나 죄송스럽고 부끄러워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두 알고 계시지만 다른 제자들 앞에서 추락했던 제자의 체면을 세워주시고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려고 특별히 지명하여 물어보십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라’ 하신 말씀처럼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주님이 맡기신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돌봐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교회도 목자의 마음으로 양들을 돌아보는 일군들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말씀으로 먹일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아직 믿음이 어린 교우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고 돌보는 일군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목사가 할 일이지만 또한 여러분이 함께 나누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어린 영혼들을 돌아보고 주님을 힘껏 따르는 일군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하십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주께서 맡기신 양들을 돌보는 일은 죽음도 감수하는 일이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억지로 띠 띠워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죽음이라 했으니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다음 주일에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을 또 나누기로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에도 영광의 길에도 주님과 동행하며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는 제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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