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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것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신 6: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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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신 6:20-25)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을 흔히 ‘6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인구 500만의 이스라엘과 3억에 가까운 아랍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쟁 발발 6일만에 승리를 일구어냈습니다. 

이 때 있었던 유명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조국에 전쟁이 터지자 전 세계로 유학을 가 있던 이스라엘 청년들이 자진해서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너 하나 군대에 간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뭐하러 일부러 그 위험한 전쟁터에 가려고 하느냐”고 말렸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청년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간다고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자식이 내게 ‘아버지, 우리나라가 전쟁을 치룰 때에 아버지는 어디 계셨나요?’ 그렇게 물어온다면, 나는 무어라고 대답할 것이냐? ‘나는 운이 좋게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무사히 살아났단다.’ 그렇게 말할 바에는 차라리 지금 전쟁터에 가서 싸우다가 죽는 게 더 낫다.” 그러면서 책을 덮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총을 들고 조국을 위해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훗날 자식들 앞에 부끄럽지 않는 아버지, ‘나라가 어려울 때 이 아빠는 이렇게 했노라’고 말해 줄 수 있는 떳떳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로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또 믿지 않는 여러분의 이웃들이 “당신의 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바쁘고 살기도 어려운 데 왜 시간을 들여가며 교회에 다니고, 봉사한다고 힘들어하고, 재미있는 세상의 즐거운 것들을 다 버리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십니까? 때로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왜 우리가 힘들게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해야 하느냐”고 항의한다면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후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다른 어떤 법들보다 더 엄격하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 산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에 보면 “하라”는 명령이 248가지이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가지나 됩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많은 제약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백성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 언약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언약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제거해 버린다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모압 평지에 와 있습니다. 그들 앞에는 요단강이 놓여 있고, 그 요단강만 건너가면 오랫동안 기다리고 소망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들이 광야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가나안 땅에 발을 내딛고 싶은 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굳게 마음에 다짐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하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는데, 신명기는 그 율법들을 총정리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반드시 이 율법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짐시키기 위해서 주신 말씀들입니다. 마치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이 시험 보기 전날 그동안 배웠던 모든 내용을 마지막으로 총정리하는 공부를 하는 것처럼, 광야생활하던 중에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총정리한 것이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새로운 것들을 많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많은 것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섬기며 살아왔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신들이 그들을 유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정착해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모압 평지에 모여 있는 사람 가운데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삶의 방법에서의 변화와 문화적 충격 등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적인 도전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적인 도전과 충격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 그들에게 주신 말씀 - 율법을 굳게 잡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래도 좀 괜찮습니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베푸신 놀라운 기적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만나를 먹게 하셨습니다. 광야생활 하면서 마실 물이 없을 때에는 반석을 터뜨려서라도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군사력이 강한 그 어떤 민족이라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들은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문제는 그 후손들입니다. 광야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식들이 태어나게 될텐데,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가나안 문화에 접하게 됩니다. 가나안 문화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광야에서 받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십계명을 외워라. 율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율법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아무리 강조해도, 광야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보지 못한 후손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물어올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고리타분한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그렇게 항의하며 물어올 텐데, 그 때에 부모들이 그런 후손들에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무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합니까? 

가장 먼저 그들이 대답해 주어야 할 내용은 ‘우리는 옛날에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이란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전에 노예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말입니까? 부끄러운 과거입니까? 그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면 그걸 자식들에게 자랑스럽게 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머슴살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도 손가락에 여섯 개가 있어서 ‘육손이 아저씨’라고 부르던 머슴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일 년에 쌀 몇 가마니 받기로 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남의 집에 머슴살이를 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나는 아무개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사람이오.’ 그렇게 자랑하고 다닐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자식들 가운데서도 아버지가 머슴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이기 때문에 감추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자식들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그렇게 물어오거든 가장 먼저 ‘조상들이 옛적에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했던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노예생활했던 노예란다’ 하는 말보다는 ‘우리는 자랑스러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특별하게 선택된 민족이다’ 그런 것들을 말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런 건 전혀 쓸데없는 자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노예 출신이란다’ 그렇게 가르쳐주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언약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할 그 어떤 것도 자기들에게는 없습니다. 천민 중에 천민인 종살이했던 사람일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종살이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가르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에 종살이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 얼마나 귀한 은혜인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의 가족이나 이웃들이 “당신은 왜 예수 믿습니까? 당신은 뭐가 좋다고 교회에 다니십니까?” 그렇게 묻거들랑 가장 먼저 ‘예전에 나는 죄에 종노릇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지난날의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를 숨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난날 우리가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셔서 ‘구원받은 백성이요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천국 백성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지극히 큰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면서, 죄가 시키는 대로 어둠의 속한 일들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백성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천하게 살아가야 할 우리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이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의 비천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을 잊지 않을 때, 오늘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디모데전서 1:15)라고도 말합니다. 

이런 고백은 사도 바울이 인생 후반기에 한 말입니다. 그는 젊었을 때 그런 못된 짓을 했지만, 그 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이룬 업적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이룬 그 많은 업적보다도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내놓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랑할 것도 많을텐데, 왜 굳이 부끄러운 그 옛날의 과거를 자랑하듯 드러내놓는 것입니까? 그런 부끄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요즘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잘 살던 때가 있었습니까? IMF라는 어려운 경제위기를 겪기도 했고, 미국발, 유럽발 경제위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난 일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비록 다 지난 일이지만, IMF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2의 국치일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옛날에는 군사력으로 남의 나라 땅을 빼앗고, 정치권력을 지배했습니다. 주권을 그렇게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가장 무서운 침략이 경제찬탈이고, 문화 지배입니다. 

1997년 우리나라가 IMF의 차관을 받기로 한 것은 곧 IMF에 우리나라의 경제주권을 넘겨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재경부에 IMF 사무처가 설치되고, IMF에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감시했습니다. 감사하게도 3년 8개월 만에 IMF로부터 빌린 돈을 다 갚음으로 IMF를 졸업하긴 했지만, 우리는 IMF를 겪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언제 또 다시 그런 금융위기가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의 잘 사는 나라의 모습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불과 15년 전에 겪었던 IMF도 가르쳐야 합니다. IMF가 준 교훈도 가르쳐야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민족에게 큰 아픔을 주었던 6.25전쟁과 그 교훈도 가르쳐야 합니다. 2년 전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30세 미만인 사람 중에서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47.4%나 된다고 합니다. 중고등학생은 56.8%가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이 절반 이상이 6.25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6.25가 우리나라와 일본이 싸운 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IMF도 가르쳐주어야 하고, 6.25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어야 하고, 일본식민 시대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비록 부끄러운 과거일지라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나라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30-4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먹고 살기도 힘든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아이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아이들 학교 보내기 위해서 논도 팔고 소도 팔고 집도 팔았습니다. 나는 굶어도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보람이라고 생각하고 굶주리면서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아이들 가르쳐봐야 아이들이 부모님들 고생한 것 얼마나 인정해 줍니까? 자식을 가르치고 키우기 위해서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도, 자식들에게 힘들다는 내색 하지 않고, 어렵다고 하소연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부모의 도리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합니다. 자식들 키울 때에 힘들고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들이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적인 희생을 알게 됩니다. 자녀들이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게 미덕만은 아닙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 가정에서 아이를 입양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입양하고 나서 아이를 양육하는 모습에서 미국이나 유럽 등 소위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나라와 우리나라가 많이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에서는 입양했다는 사실을 될 수 있는 대로 숨기려고 합니다. 데려온 자식이라는 것아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서 입양했다는 것을 숨깁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에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입양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입양했다는 것을 가르쳐주면 그 아이가 비뚤어지고 모나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타난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서양의 경우에 보면, 입양되어 온 아이에게 ‘너는 어느 나라에서 입양해 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는 자신을 버렸지만, 지금의 양부모는 자신을 거둬들여서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종 뉴스에도 나오지만, 입양된 아이들 가운데서 훌륭하게 자라서 고국을 방문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는 숨기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드러낼 것은 드러내고,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려웠던 지난 이야기를 꺼내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가르쳐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의 부모들은 예수 믿지 않았을 때와 예수 믿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자주 아이들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과거를 알려줌으로서 오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과거 없는 사람이 없고, 과거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에게 과거는 다 있습니다. 어떤 것은 자랑스러운 과거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과거라고 해서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스페인 출신의 미국 시인 조지 산타야나(G. Santayana, 1863-1952)는 “과거를 무시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기들의 조상이 노예출신이라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예출신이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걸 감추면 하나님의 은혜도 감추어집니다. 그걸 드러내야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그걸 드러내어 가르쳐주어야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고, 지금까지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과거가 지워지는 순간 오늘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지워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과거를 잊는 순간 우리의 삶에 감사도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드러내 놓기가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 과거를 잊으려고만 하진 마십시다. 그 과거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다. 그 과거에 통해 오늘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고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십시다. 내가 부끄럽다고 감추면 나를 통해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이 감추어지고 맙니다.

존 뉴튼(John Newton, 1725-1807)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2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린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였고, 노예를 매매하던 노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폭풍우가 불던 어느 날 그는 파선할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고, 남은 생애를 오직 주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써 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 올니 교회에서 27년을 섬겼다.” 
  
그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지은 유명한 찬송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찬송입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는 찬송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알려지지 않기에 찬송을 통해서, 또 묘비를 통해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는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감춘다 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다면 그 부끄러운 과거가 오히려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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