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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욥 3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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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나아갈 때 (욥 35:9-16)

전문번역가인 <공경희>씨가 번역한 책 중에 <고든 리빙스턴>이 쓴 『서두르다 잃어버린, 머뭇거리다 놓쳐버린』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How to Love, 사랑하는 법>입니다.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인생과 결혼에 대해 충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경희씨는 번역후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예쁘게 살게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한 번 살아보라지. 예쁘게 사는 게 마음대로 되는지.......>라고 쓰고 있습니다. 번역가의 장난치고는 좀 심한 것 같지요. 그런데 이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실제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게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결혼생활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 자체가 모순 덩어리요, 그 내부엔 많은 고통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욥의 친구들과 욥의 말이 모두 끝난 후, 옆에서 듣고만 있던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대목 중 일부입니다. 그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많은 말을 했지만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나섰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9절을 보면 그는 고통이 온 세상에 만연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학대>라는 단어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또 복수형을 사용함으로써 학대가 광범위하고도 매우 심하게 퍼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불평등들, 가정의 문제들, 부익부 빈익빈, 강대국과 약소국의 문제, 불합리한 법으로 인한 문제들 등 수많은 아픔이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나 있어왔습니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기도 하고, 죽는 것보다 괴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학대를 당할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지금까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 해 왔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돕는 작은 일로부터 시작해서 법을 개정하는 일, 투쟁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극단적으로는 국가와 사회를 전복해서라도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들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이런 노력들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노력들은 벽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러시아가 그 예입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사회적 부정과 타락이 극심했고, 빈부 격차가 컸습니다. 이런 와중에 많은 무산 대중들이 뭉쳐 황제와 귀족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게 소위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혁명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제정 러시아 시대의 지도층들은 죽거나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세상에 학대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러시아가 무너진 후 등장한 공산 국가인 소련에는 오히려 폭력과 불평등과 무자비한 탄압이 더 심했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과거와 다른 것은 학대하는 사람과 학대받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북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김일성 일가와 그 주변의 충성 세력만 사람이고, 나머지 백성은 짐승보다 못합니다. 무자비하게 백성을 학살하고 탄압하고 있고, 불쌍한 백성들이 사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사회는 변화되었지만, 과거 사회보다 더 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열매로 편리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닙니다. 과거나 현재나 이 세상에는 행복과 슬픔, 웃음과 울음의 이중창이 가슴 아프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좌절 앞에서 엘리후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사람들이 학대를 받으면서도,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음을 책망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짐승보다, 새보다 월등히 뛰어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새번역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짐승이나 새가 가진 지혜보다 더 나은 지혜를 주시는데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러분, 짐승과 새보다 월등히 고귀하게 지음 받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어떤 면으로는 짐승처럼, 혹은 짐승 보다 더 못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 나는 새는 먹을 것을 위해 농사를 하지 않고, 들의 백합화는 입을 것을 위해 길쌈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와 백합화가 오히려 사람보다 행복해 보입니다. 이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먹지 못해서, 더 좋은 옷을 입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이러다보니 사람은 욕망으로 인해 다 망가졌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예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욕망입니다. 글쎄요, 하나님이 되면 만족할까요? 만약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면 그 후에는 하나님보다 더 위대해지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 욕망으로 행복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망가졌습니다. 원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으로 지어주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고통들을 만나도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실 욥기의 구성을 보면 욥이 당한 고난이란 문제를 두고, 그 원인과 해법을 찾기 위해 욥과 친구들이 벌이는 토론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인간적인 의로움이, 지혜가, 해결책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상처만 깊어지고, 고통만 가중되었습니다. 

이제 욥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대 받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은 성경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은 말씀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또 호세아서 6장 1절에서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고통 중에 나아갑시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투쟁과 노력이 좌절될 때도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신앙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엎드리든지, 두 손을 가슴에 모으든지, 아니면 두 손을 들어 올리든지, 그리고 그 앞에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모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한 후에 엘리후의 이야기는 반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그가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2-13절을 보세요.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엘리후는 욥이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고,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엘리후는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즉 욥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외침과 기도는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긴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도,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헛된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헛된 것>은 <망령된 것>을 말합니다. <헛된 것>으로 번역된 단어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인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할 때, <망령되게>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도, 높이지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위엄을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태도를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존경함이 없이,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극심한 고난을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신하지도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높이는 마음과 참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들을 치료하신 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들을 구원한 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 중언부언하는 것, 형식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욥이 드리는 기도가 이처럼 헛된 것, 망령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욥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가 볼 때 욥은 교만했고, 그의 기도는 교만했습니다. 그는 욥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지 않고 버틴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금요일에 묵상했던 욥기 33장 9-11절을 보면 엘리후가 욥의 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이게 엘리후가 이해한 욥의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하나님 앞에 죄가 많아 징벌을 받았는데도, 욥은 자신이 순전하고 불의한데 억울하게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볼 때 욥은 아직도 자신의 죄를 모르고, 아직도 교만하여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4절을 읽어볼까요?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 보냐> 엘리후가 볼 때 욥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아직 그 마음에 진정으로 간절함이 없고, 믿음의 기대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절박하지도 진실하지도 않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것은 참 믿음과 간절함으로 나가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시편 145편 18-19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자 그럼 엘리후의 말을 좀 더 읽어봅시다. 그는 욥을 점점 더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15-16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이 말은 좀 심해 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더 때리지 않고 봐 주고 계시기 때문에 욥이 아직도 헛된 말을 늘어놓고 있구나. 이제 하나님께서 더 아프게 때리시고, 혼쭐을 내셔야 정신을 차리겠구나!>란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재산도, 자식도 다 잃고, 자기 몸에 병까지 든 욥에게 남은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더 받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죽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여러분, 나라의 형편이나 개인이나 가정 등이 이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보아도, 남이 보아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막판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엘리후가 욥을 몰아붙이듯이 그런 고통이 다가올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이 욥기의 최종 결론이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그 중에 명심해야 할 진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본문은 어디까지나 엘리후가 한 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후의 말 중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참 믿음과 회개로, 간절함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욥에 대해 가진 생각, 즉 <하나님의 진노를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더 큰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잃어버린 모든 것을 두 배로 갚아 주셨습니다. 재산도 두 배로 주셨고, 잃어버린 수만큼의 자녀도 주셨습니다. 

친구들의 말도 고통스러운데, 엘리후까지 욥을 몰아붙일 때, 욥은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을 버리신 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셨습니다. 오히려 욥에게 진노하신 게 아니라, 온 세상 앞에 <내 종 욥을 보라, 욥 같은 사람이 또 있느냐?>라고 자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42장에 가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고, 욥이 기도했을 때 친구들을 용서하셨습니다. 42장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신 게 아닙니다.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지금 현실이 어렵다고 해도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학대가 많고,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목숨 건 투쟁을 하든지,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낄 때, 그 긴장이 고조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욥기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해결방안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이 욥기의 메시지입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이 바닷가에서 노는 한 꼬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꼬마는 작은 조개껍질에 바닷물을 담아 자신이 판 모래 웅덩이에 물을 옮겨 붓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물었습니다. <뭐 하느냐?> 꼬마가 말했습니다. <이 바닷물을 모두 웅덩이로 옮기려구요....> 

여러분, 이게 우리네 모습입니다. 그 넓디넓은 바다, 그 엄청난 물을 어찌 작은 웅덩이에 옮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다와 같고, 우리는 조개껍질을 들고 있는 꼬마와 같습니다. 더 이상 무한한 존재를 담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되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학대 앞에서, 온갖 불합리 앞에서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 소극적인 믿음의 기다림이야말로 그 어떤 적극적인 인간적 노력보다 위대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읍시다. 의심하지 맙시다. 우리 삶의 제반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개입과 해결의 은총이 임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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