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요 11:39-44)

첨부 1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요 11:39-44)

감리교회 창시자 웨슬리(J.wesley)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는데 거의 절반이 졸고 있는 것을 보니 화가 났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이야! 불!” 잠자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허둥대며 “어디야 어디서 불이 났어?”하며 소란을 피우는 교인들을 바라보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하기를 “지옥에서 불이 났습니다. 설교시간에 잠자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지옥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렇게 잠을 깨우고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 하시고 무덤으로 향해 가셨습니다. 성경은 잠자는 자와 죽은 자를 동일하게 잔다고 말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5:14)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셨습니다.

󰊱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39절) 이곳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한 일입니다. 
  
무덤을 가로막은 돌을 들어 옮기라는 것입니다. 돌이란 움직이지 않는 문제의 상징입니다. 그 돌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 돌은 분리의 벽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단절의 벽입니다. 그 돌은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를 차단하는 장벽입니다.
  
담벼락하고 말하는 것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의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그 돌을 치우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과소평가 합니다. “너는 할 수 없어” 이런 말을 주로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나는 안돼” 이렇게 치부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우선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십니다. 사람을 시켜 돌을 치우게 하셨습니다. 
  
그 돌은 차단의 경계석입니다. 차단이 무엇입니까? 막거나 끊어서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을 차단하고 있는 문제의 돌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단절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돌입니다. 소통이 아니라 불통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그렇고 지도자와 백성사이가 그렇습니다. 관계가 막혔거나 끊어져 있습니다.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눈도 가리면 안보이고 마음도 닫으면 안 통합니다.
  
어느 마을에 “단절”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살았습니다. 오른쪽에 사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잘난 체 하고 도도해서 불편합니다.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보려고  벽돌로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얼마 지나서 왼쪽 이웃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단절이는, 그 사람은 욕심이 많아 언제나 자기중심이란 말이야... 왼쪽 집 사이에도 벽돌로 담을 쌓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뒷집하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거기도 담을 쌓았습니다. 
  
이제 마음 편히 살 것 같아 혼자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담쌓고 틀어 박혀 있는 것은 죽은 자입니다.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38절) 막힌 돌을 옮겨 놓아야 통로가 생깁니다. 우선 담을 허무는 것이 죽은 자가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벽이 있으면 불통입니다. 뚫어야 들립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경계의 돌을 치워야 합니다.   

  
󰊲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마르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들고 나가서 맞으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0-23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은 누이동생 마르다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고칩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벧전1:9).
믿음의 말은 엄청난 창조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는 사업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사업으로 성공했다고 존경까지 받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후세까지 존경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사업도 성공하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포드는 성공비결을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믿는 대로 된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성공할 수 없다.” 
  
강철왕 카네기도 그렇습니다. 카네기는 “환상과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은 없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강조하는 핵심 단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추상 명사가 아닙니다. 행동하는 동사입니다.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할 때 그것이 곧 진정한 믿음입니다. 제대로 된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서도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용이 재산이고 신뢰와 확신이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긍정보다 부정을 선택합니다. 인생은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합니다. 부정을 부정하고 긍정을 긍정할 때 거기서부터 삶의 실타래는 풀리기 시작합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마가 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다마호사”라고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호사다마” 보다 “다마호사”가 좋습니다.
  
슬픔이나 시련이 있으면 반드시 기쁘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반대편 문이 열립니다. 절망이 닫히면 희망이 열리고, 희망이 닫히면 절망이 열립니다. 내 머리에 절망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희망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희망이 먼저 앉아 버리면 절망이 앉을 수 없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오라비가 살아나리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대로 기도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기도하게 한 것입니다.  
  
  
󰊳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열린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 나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리라”(요5:21)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얻은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내가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절)
  
이렇게 기도하신 후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43-44절) 큰소리는 목청을 높여 크게 하는 말입니다. “고성”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외치셨습니다. 나병한자 열사람이 고침을 받았으나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눅17:15).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한 기도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낸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자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게 하는 귀신을 기도로 내쫓아 주셨습니다. 기도가 천국열쇠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여! 하고 친밀하게, 경외심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역시 아들의 기도입니다. 아들이 구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신 후, 죽은 자를 향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냄새가 나던 시신이 살아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두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큰 소리가 큰 일을 해낸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큰 소리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소리로 죽은 자를 살려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6,28) 나사로에게 예수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 속에 있는 생명의 소리를 나사로 속에 들어가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시인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주님께서 개인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 기적이 나타납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아! 부르시더니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더니 그는 변했습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뀌었습니다. “나사로야!” 부르시더니 죽었던 자가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꽃을 보러 모인 사람들 같았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습니다(요12:11).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가 복음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게 하십시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 무덤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거기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