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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다섯 가지 확신 (눅 11:11-13)

첨부 1


성도의 다섯 가지 확신 (눅 11:11-13)
  

들어가는 말

4월이 되면 늘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인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4월 21일은 주기철 목사님이 1944년 평양에서 순교하신 날입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결국은 순교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4월의 진달래보다 더 붉은 피를 한국교회의 제단에 바치고 영원한 승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것 때문에 바칠 수 있습니까?
교회에 처음 오시는 분들을 환영하면서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을 건넌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들어보셨지요? 
창14:13절입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알 듯 모를 듯하고, 별로 우리와 상관이 없는 듯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란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말은 ‘강을 건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아브람은 하란이란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란에 살고 있는 아브람을 불러내어 ‘내가 네게 지시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란과 가나안 땅 사이에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강이 바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유프라테스 강입니다.(Euphrates river)
그러므로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온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강을 건넜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강을 건너온 사람 아브람’이라고 표현합니까?

‘강 저편’은 하나님이 없는 땅입니다.
‘강 이편’은 하나님이 있는 땅입니다.
강 저편에 있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요, 강 이편에 있으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브람은 강을 건너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에베소서에 보면 ‘강 저편과 이편’을 ‘그리스도 밖과 그리스도 안’으로 설명합니다.
엡2:12-1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 밖’이라는 말과 ‘그리스도 안’이란 말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강 저편과 이편으로 갈라졌는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밖과 안으로 갈라집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지위와 자격과 권리와 축복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한 번 교회에 나왔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그리스도 밖과 안으로 갈라지는 사건입니다.

이 첫걸음은 인생에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이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5가지로 정리해봅니다.

1. 죄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엡2:8절을 읽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자 보십시오!

1)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라는 구절이 있잖아요?
은혜란 거저 받는 것- 쉬운 말로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에 해당하는 벌을 대신 받게 하시고, 우리를 거저 구원시키셨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 복음,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빚을 진 사람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빚이 다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 빚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고민하고, 걱정했는데....... 
죽을까도 생각해봤고, 도망갈까도 생각했는데....... 
그 빚이 없어졌다면,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지 않겠어요? “이게 진짜냐?” 하지 않겠어요?
영혼의 빚, 죄의 짐이 공짜로 벗어졌다는 이 사실! 
이 꿈만 같은 사실에 크게 감격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2) 그런데 그 은혜는 내가 믿을 때에만 나의 것이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아무리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거절하면 그 은혜는 소용이 없습니다.
민21장에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광야의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이렇게 다 죽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들을 구원할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 장대에 달린 뱀을 보기만 하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놓고 소리 소리칩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여러분, 고개를 들어 이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낫습니다. 어서요! 어서요! 쳐다보세요.”
그랬는데 무슨 심보인지 쳐다보기만 해도 되는 그 쉬운 일을 하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모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공짜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하늘이 무너져도 확신해야 합니다. 아멘.

2.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습니다.

마1: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성경에서 ‘엘’이 붙는 것은 다 ‘하나님’을 뜻합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 그 이상 더 큰 축복이 없고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데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다 된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후계자 여호수아.
그에게는 가나안 점령 전쟁을 수행해야하는 막대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가나안 7부족과 싸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군사력을 비교해보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해야 할 판입니다.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두려움이 물려왔습니다.
무릎이 맞부딪힐 정도로 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약속해주었습니다.

수1:5-6절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까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특징은 기죽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것입니다.
당당하되 겸손하고 확실하고 부드러운 것이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임마누엘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3.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눅 11:9-13절을 보겠습니다.
좀 길게 인용합니다만 잘 들어보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절의 말씀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꼭 명심해야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서 ‘하물며’란 ‘두 말할 나위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마음이 더 클까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클까요?’
당연히 주시려고 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할렐루야!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면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늘이 무너져도 확신해야할 사실입니다. 

4. 천국을 보장 받습니다.

계20:12-1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는 말씀을 귀담아들으십시오.

불 못은 지옥을 말합니다.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때때로 구원의 감격을 느끼고, 고백하고, 고마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날의 감격에 비하면 천만 분의 일, 일억 분의 일 정도나 될까요?
그날에는 무릎을 딱 치면서 “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렇게 소중하구나!”하고 감격할 것입니다.
반면,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보다 더 무섭고, 두렵고 끔찍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 살전 4:13절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함이라.” 
죽는 것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잔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잔다.’라는 것은 ‘깨어남’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깨어날 것이니까 죽는 자들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소망 없는 자 같이 울고불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 출판사’에서 나온 ‘사후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죽었다가 깨어난 사람) 2만 명과의 인터뷰 내용을 모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Ross,1926-)라는 스위스 정신과 의사가 쓴 책입니다.
아주 실감나는 내용으로 신앙인에게 굉장히 위로가 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살다가 죽는 것을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고치가 열리면 그 속에 갇혀있던 번데기가 나비로 변해 하늘을 오르지 않습니까?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하늘을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죽는다는 것은 더 좋아지는 것이로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이 무너져도 천국 소망을 확신해야 합니다.

(찬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5.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영성입니다.

불교의 영성은 속세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정,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업, 하나님이 기뻐하는 직장,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십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저주하거나,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모두가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미국을 떠나 한국에 온 선교사 한 가정이 있습니다.
‘아처 루벤 토레이’와 ‘제인 그레이 토레이’입니다. 
한국명으로 ‘대천덕’과 ‘현재인’입니다.
‘대천덕’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신문에 난 글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젊은 제인(Jane)은 1947년 어느 날 젊은 아처(Archer)의 초상화를 그렸다. 한참을 그리던 제인이 갑자기 붓을 놓았다. “더 이상 못 그리겠어요.” 그리고는 한마디 했다. “아처, 사랑해요.” 이들은 1948년 8월28일에 결혼했다. 

아처는 프린스턴신학대학원과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한 전도양양한 청년이었으며 제인은 샬럿시 퀸즈 칼리지의 메이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모의 미술학도였다. 제인이 아처에게 사랑을 고백한 지 18년 후인 1965년 이들은 강원도 태백시 하사미리의 외나무골이라는 산골짜기를 찾았다. 그리고 이후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지난 4월 16일 서울 정동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린 고 현재인 사모 장례예배에서 복음성가 가수인 이무하씨가 현 사모의 평생 신앙고백이 담긴 노래 ‘땅 끝에서’를 불렀다. ‘주께서 주신 동산에 땀 흘리며 씨를 뿌리며/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날 사랑하시는 내 주님께/ 
비바람 앞을 가리고 내 육체는 쇠잔해져도/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내 사모하는 내 주님께/ 
땅 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안고/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노래 가득안고/ 
땅의 모든 끝 찬양하라 주님 오실 길 예비하라/ 

땅의 모든 끝에서 주님을 찬양하라 영광의 주님 곧 오시리라.’ 젊은 아처와 제인은 화려함이 담보된 장래의 모든 삶을 뒤로하고 땅 끝인 한국으로 왔다. 모든 사람이 기를 쓰고 서울로 올라오던 그 시절에 땅 끝인 강원도 산골짜기로 갔다. 젊은 날, 그들이 한국으로 떠나려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아처, 제인, 어리석은 결정이야. 삶은 그다지 길지 않다네. 대책 없는 낭만은 버리라고….” 
강원도 태백으로 떠날 때, 한국인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아니, 당신들이 왜?”‘땅 끝으로’ 떠난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장례식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젊은 아처와 제인은 ‘땅 끝에서’ 모든 삶 드리며 주께 드릴 열매 가득 맺었다. ‘땅 끝으로’ 떠난 그들의 결정은 옳았다! 이 땅의 젊은 그대들이여, 땅 끝으로 떠나라!”
모두가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땅 끝’을 살피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축복을 받습니다.

1. 구원을 받습니다.
2.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습니다.
3.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4. 천국을 보장 받습니다.
5.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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