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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슴에 멍이 든 하나님 (창 1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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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멍이 든 하나님 (창 16:7-16)


[주님의 천사가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은 수르로 가는 길 옆에 있다. 천사가 물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 그래서 그 샘 이름도 브엘라해로이라고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그 샘은 지금도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다.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난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

• 오늘, 우리 삶의 자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 제3주인 오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초록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지구의 날’이기도 합니다. 한 번만이라도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의 건강을 생각해보면서, 이 기후재앙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작은 실천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흐름이 될 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거대한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 내내 가슴에 멍이 든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벚꽃나무 그늘 밑을 걸어도 그렇고, 봄 농사를 예비하고 있는 들판을 바라보아도 그랬습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 사회는 참 어지러운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몇 분 동안이나 구조 요청 전화를 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절체절명의 시간, 세상은 한 개인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연예 기획사 사장이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 연예인 지망생을 성폭행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게다가 그는 어린 가수들조차 그 일에 가담하도록 지시하고 자기는 CCTV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이 어떻게 괴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중학생 하나가 친구의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뒤에서 연필로 자꾸 찌르고, 때리고, 부하처럼 거느리려 했기에 그는 공포와 아울러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할 방법이 없자 그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됨을 배워야 할 학교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카이스트 학생 한 사람은 경쟁에 시달리다가 삶의 무의미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우리 삶의 자리가 죽음의 벌판이 된 것 같습니다. 효율성,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경쟁 속에 내몰리는 이들의 가슴을 열어보면 퍼런 멍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느닷없이 떠나보낸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죽음 소식을 듣곤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군이 자살 폭탄으로 훼손된 아프가니스탄 병사의 시신을 조롱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 도대체 인간이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우리 사회는 어느덧 이웃의 고통에 둔감한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목자의 이야기는 ‘어느 좋은 날’의 신화가 되어버리고 만 것 같습니다. 

• 하갈의 한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의 집에서 벌어진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삶은 늘 위태로웠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태어난 곳, 살고 있는 땅,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위험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세계와 직면하는 것은 자아의 한계를 넘어 세계인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이끈 것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약속이었습니다.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원대한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에 그는 온갖 시련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식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태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내 사래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의 몸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아이를 얻고, 이 아이를 통해 집안의 대를 이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동의했습니다. 고대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누지(Nuzi) 문헌에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소실로 줄 수 있다고 되어 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본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여종은 유모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하갈은 곧 임신했습니다. 

성경은 임신한 하갈이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깔보았다’는 표현은 좀 과한 번역입니다. 아기를 임신한 여인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과 자부심을 사래는 곱게 보아줄 수 없었던 것 아닐까요? 파탄의 조짐은 그렇게 찾아옵니다. 사래의 쓰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하갈의 자부심, 그리고 하갈의 임신을 흔쾌히 축하할 수 없는 사래의 조붓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여인의 갈등에 개입하여 그 문제를 풀어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는 우유부단합니다. 상처 입은 사래가 하갈에 대해 불평을 터뜨리자 아브라함은 ‘당신의 종이니 당신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관습법에 의하면 사래가 하갈에 대한 처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브라함의 태도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남편의 묵인 하에 사래는 하갈을 억압합니다. 팥쥐 어멈처럼 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갈은 억압과 차별대우를 감내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아기의 장래를 위해 광야로 탈출을 감행합니다. 하갈은 잡초와 같은 여인입니다. 남에게 부림 받으며 살아왔지만 자기 태중에 있는 아이까지 천덕꾸러기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광야로 탈출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의 열망은 죽음의 공포보다 강력했습니다. 

• 들으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

하갈이 수르로 가는 길 가에 있던 샘물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다가왔습니다. 이때 천사는 천상적 존재라기보다는 ‘낯선 존재’를 뜻하는 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주 단순하게 전할 말을 전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말은 극단적인 슬픔이나 어려움에 빠진 사람의 상황을 뒤바꿔놓는 전환점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의 행색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넵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참 단순한 문답입니다. 하갈은 ‘어디서 와서'라는 질문에는 답하고 있지만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정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말합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어찌 보면 요령부득의 지시입니다. 결심하고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라는 지시처럼 난감한 지시가 없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하갈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10)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약속이 하갈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자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들으신다는 것은 그 일에 개입하여 그들의 한을 신원하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천사의 말은 계속됩니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12) 

이게 위로의 말, 격려의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통이 없는 평안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 여행자인 인간에게 ‘불안’은 실존의 조건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인 것이 미래인 데, 어찌 불안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건강한 삶이란 시련과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뜻을 찾아가는 삶일 겁니다. 

삶이 본디 어려운 거라고 생각하면 작은 고통에도 비명부터 지르거나 엄살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생명에 위협을 가하거나 위축시키려 하는 온갖 힘들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전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갈은 감동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엘 로이’, 즉 ‘보시는 하나님’이라 명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갈이 서있던 그 샘은 ‘브엘라해로이’ 즉 ‘나를 보시는 살아 계시는 분의 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두루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진 사람들 곁에 머무시며 그들을 지키시고, 사자굴 속에 던져진 사람 곁에 다가가 그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났기에 하갈은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현실과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 새로운 삶의 연습

오늘의 설교 제목은 ‘가슴에 멍이 든 하나님’입니다. 아주 오래 전 기가 막힌 현실에 대한 증언을 들은 후 ‘하나님, 당신도 우리처럼 가슴이 미어지십니까?’ 하고 울부짖던 어느 목사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최승호는 일찍이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인간대접 받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이들의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고스란히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 신음하는 피조물의 탄식소리에 가슴이 타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새러 로이(Sara Roy)의 글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생환한 아버지의 팔에 새겨진 푸른색 번호를 보며 자란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나라 없이 떠도는 이들의 설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여러 해 전 그는 팔레스타인 땅을 찾았습니다. 학자로서 ‘점령’의 현실이 점령지 사람들의 경제생활, 일상생활,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어느 날 일단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이 지긋한 팔레스타인 사람을 조롱하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3-4살 쯤 된 손자와 함께 당나귀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을 불러 세웠습니다. 군인들은 당나귀에 실린 짐을 검사한 후 당나귀의 입을 벌려보며 말했습니다. “이봐, 이 당나귀의 이가 왜 누래? 날마다 닦아주지 않나보지?” 노인은 당황했고 아이는 겁에 질렸습니다. 노인이 침묵하자 군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대답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야비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노인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군인은 노인에게 당나귀 뒤에 서게 한 후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추라고 지시했습니다. 노인은 거절했지만 군인의 강압에 못 이겨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는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췄습니다. 아이는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광경을 보며 군인들은 웃으며 사라졌습니다. 그 노인과 둘러선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려던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입니다.(Sara Roy, ,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Vol 32, No. 1, Autumn 2002, Issue 125) 

새러 로이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14:31)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이런 모욕과 폭력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슴은 멍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멍을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역사의 섭리자로 믿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쉬지 않고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기가 막힌 현실을 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쓰린 가슴을 부여잡은 채 광야 길로 접어들고 있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바로 우리들을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삼아 그들의 가슴에 희망을 부어주려 하십니다. 이런 놀라운 일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든 멍을 풀어드리기 위해 움직일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덩이를 녹여주십니다. 환하게 피어난 꽃들이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가져다주듯이, 주님의 빛을 받아 환해진 우리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평화의 꽃, 생명의 꽃, 웃음꽃이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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