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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영광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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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 (빌 2:5-11)


지난주 이 시간에도 같은 본문, 같은 제목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간관계로 다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리므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본문 10절~11절에“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들과 땅의 높고 낮은 모든 권세자들과 천하의 만물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어느 날 우연히 저절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반드시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리의 영광은 어느 때에 있어진 것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낮아지신 후에 주어진 영광입니다. 본문 6절~8절에 기록하시기를“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신 후에 주어진 영광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셋째, 부활의 영광은 죽음 후에 있었습니다. 
본문 8절 하반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 즉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부활의 찬란한 아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별세신학”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죽음의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내가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독단적인 창안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가운데“별세”라는 용어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9장 31절에 기록된“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라는 성경의 인용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인 짐승을 죽여 각을 떠서 단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절에는 제사에 대해 기록하시기를“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몸이 살았으나 죽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 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식물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은 건강하게 살아 있지만 내 속에 내 자아가 다 죽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내 자신의 입장과 유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심,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아집과 독선 등 이러한 요소들이 다 죽어지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단계에 이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행하신 특단의 실천 교육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한복음 13:17)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내가 발을 씻어준 그 의미를 알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발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발은 인간의 지체 중에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발은 온 몸을 일생동안 받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봉사하지만 불만이나 불평한마디 하지 않는 겸손과 봉사의 지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발은 다른 지체들과 달리 평생토록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밖으로 내놓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답답하고 냄새나는 신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말없이 섬기는 일만 합니다. 생색한번 낼 줄 모르고 심지어 무좀이나 동상으로 자신이 썩을지라도“위에 있는 다른 지체를 향해 너희들은 좋은 곳에 있으면서 나만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고 불평 하지 않습니다. 

발은 언제든지 궂은 일, 험한 일을 솔선수범합니다. 다른 지체들이 다 들어가기 싫어할 때 혼자 더러운 것을 다 감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삶이 발 역할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발처럼 낮고 추한 곳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시고“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 발의 의미를 알고 행하면 복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지체는 발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누구도 마라톤 선수의 발을 붙잡고 환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손을 붙잡고 수고했다고 악수하며 격려를 합니다. 또 그 영광의 꽃다발은 손에 안겨주고, 메달은 목에 걸어줍니다. 텔레비전에는 얼굴이 나옵니다. 발은 그것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뛰고 달리느라 고생은 혼자 다 했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이 발바닥 마음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더러운 먼지를 씻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발처럼 사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 5절에“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발바닥 마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발이 되어 살아야 하며 그 발로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발은 가장 낮은 곳에서 밟히고 있습니다. 발의 자리처럼 낮아져 다른 사람을 높여 주고, 위해주고, 아껴주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예수가 없는 철저히 자아를 죽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예수님 안에 예수는 없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뜻만 있으셨습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만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한 방법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십자가의 죽음만을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잘못된 표현입니다. 만일 예수님 마음속에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추한 이 세상에 오셨겠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그 많은 수치와 핍박을 어떻게 참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 이미 죽으시고 예수님 안에 인간 예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몸부림 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기록하기를“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말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속사람을 날마다 죽이고자 노력한 바울사도는 자신을 표현하기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은 나”(고전 15:8),“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인물가운데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바울사도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자신을 이토록 낮추어 말했습니다. 이는 곧 그 속에 바울 자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만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나는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힘쓰노라(고전 10:31), 나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나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힘쓰노라(빌1:20)”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 속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울은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말하기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운전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아를 죽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고자 몸부림친 바울을 사랑하셔서 존귀하고 위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유럽을 위시하여 온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 유럽과 북미대륙을 거쳐 오늘 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언제나 죽음 뒤에 찾아옵니다. 가정 행복의 부활, 삶의 성공의 부활, 모두가 내 속에 있는 나를 몰아내고 내 삶의 운전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바꿀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내 삶의 핸들을 내어 드린다면 그것은 후회 없는 탁월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참된 행복의 여행, 보람된 삶의 여행, 영원한 생명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실패의 불안함이 없어집니다. 승리의 기쁨이 가득합니다. 내 속에 내가 죽고 없어져야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셔야 비로소 밝은 빛이 비취게 됩니다. 부활의 환희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다는 강한 자아는 나를 파멸로 몰아가려는 사탄의 수법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아를 죽이는 자의 삶의 가치와 그러한 사람들이 받아 누릴 축복에 대하여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말씀하시기를“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하셨습니다. 

넷째, 부활의 영광은 사명을 감당한 뒤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또 어떠한 의미의 십자가입니까? 죄악의 물결에 휩싸여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을 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고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감당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이 십자가였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려면 희생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을 바친 십자가의 희생이 있은 후 부활의 영광이 왔습니다. 

영광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6천년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임감이 아주 강했습니다. 다윗의 투철한 책임감을 잘 나타내는 말씀이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게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지킨 양은 다른 집 양이 아니라 자기 집의 양떼였습니다. 나이도 어립니다. 그런데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게 달려들면 양을 지키기 위해 그 무서운 맹수와 싸워 맹수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삶은 매사에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향해“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사도행전 13:22)고 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 역시 주어진 사명에 철저했습니다. 요셉은 가정에서는 효자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노예의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주인을 섬겼습니다. 그로인해 주인의 총애를 받아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모범수가 되어 감옥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성실한 총리 요셉으로 인해 애굽 백성들이 가뭄과 흉년을 이기고 풍요를 누렸습니다. 

한 가난한 정원사 청년이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그는 나무화분에 열심히 조각을 했습니다. 청년은 퇴근 시간 이후에도 회사 정원에 남아 조각에 몰두 했습니다. 그의 손길이 스쳐간 나무화분들은 멋진 조각품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청년에 물었습니다. 
“너는 정원만 가꾸면 된다. 조각을 한다고 임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수고를 하느냐?”청년은 웃으며 말했습니다.“저에게는 이 정원을 아름답게 꾸밀 의무가 있습니다. 나무화분에 조각을 하는 것도 저의 업무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청년의 투철한 책임감에 감동한 주인은 청년에게 장학금을 주어 미술학교에 입학하도록 했습니다. 훗날 그 청년은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가난한 정원사의 이름이 미켈란젤로입니다. 이처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영광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모든 영광은 결코 저절로, 우연히 오지 않습니다.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인격은 책임 능력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인격의 주성분은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양개치는 말하기를“책임을 자각하는 것이 인간의 시작이고,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인간의 끝이다.”라고 했습니다. 책임감이 희박하다면 그는 아직 참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탄의 사악하고 간교한 술수를 파괴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뒤에 오는 영광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낮아지신 증거입니다. 그 후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증거입니다. 그 후 부활의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아를 죽이신 증거입니다. 그 후 부활의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맡겨진 책임을 감당하신 증거입니다. 그 결과 무덤, 즉 실패를 이기시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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