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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후의 제자들을 닮지 말라 (삿 10:8-10, 요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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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의 제자들을 닮지 말라 (삿 10:8-10, 요 21:2-4)

'피터팬 증후군’이란 것이 있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도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어 과거의 어린아이로 회귀하려는 심리적 증후군을 말합니다. 동화 속의 피터팬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만족하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고 어른이 되지 않으려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신의 옛날로 돌아가려는 자기 속의 어린이가 살아나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런 증후군 외에도 옛날의 익숙한 관습으로 회귀하는 습성을 누구에게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관습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습니다. 김유신장군이 자주 가던 기녀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말을 타고 가다 잠이 들었는데 말이 기녀인 천관녀의 집 앞에 멈추었습니다. 김유신장군은 다시 기녀의 집 출입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라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쳤다고 합니다. 흔히 마취에서 깨어날 때 옛 애인의 이름을 불러 난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치매에 걸리면 다시 옛 습관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죄의 곡선은 끊임없이 내리막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바벨탑 사건으로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다윗시대에 와서 다시 회복되었지만 왕국의 분열과 범죄로 다시 떨어집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혼란이 계속됩니다. 사사기에는 아홉 번이나 반복해서 회복과 추락의 이런 하향곡선을 반복합니다. 사사를 통해 회복한 후에 다시 범죄하여 이방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악은 다시 죄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이 있습니다. 
  
뉴턴의 제1법칙이라 불리는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는 법칙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거부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죄는 이런 관성을 가집니다. 이스라엘백성들도 출애급한 다음 노예로 살았던 옛날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려고 반역을 일으킨 고라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사기 10:10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인간의 습성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란 ‘자기 추구’입니다. ‘세상 추구’입니다. 죄란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옛날 상태로 돌아가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부활 후의 제자들의 모습을 잠시 전합니다. 갈릴리에서 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갈릴리로 온 제다들 가운데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두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고기 잡으러 갈릴리바다로 갔습니다. 나머지 4제자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한 다음 제자들은 구심점을 상실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권위가 완전히 실추되었습니다. 제자 공동체가 이미 와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보리라”고 하셔서 갈릴리에 왔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와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따라 갔습니다. 다시 옛날 일과 옛날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참 쉽습니다.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갈 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료함을 달래거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어쨌든 갈릴리로 다시 고기잡이를 간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두 배에 가득 한 많은 고기를 잡을 기사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고기잡이를 갔다가 내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부활 이전의 고기잡이 경험과 부활 이후의 고기잡이 경험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고기 잡으러 갔던 제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한 번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마음이 변치 않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적 관심보다 육적 관심을 더 가진 제자를 닮지 말라. 

요한복음 21:3에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라고 합니다. 고기잡이를 왜 갔습니까? 심심해서 갔습니까? 취미로 갔습니까? 어쨌든 베드로에게 고기잡이는 육적 생계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외경 ‘베드로 복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심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동생 안드레와 마태와 함께 그물을 가지고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소일 삼아 고기 잡으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일 삼아 간 사건을 요한이 특별히 기록할 리도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이었고, 우리가 생각해 볼 일이 있다고 봅니다. 
  
베드로는 이름을 여러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 게바 등입니다. 시몬이란 이름과 베드로라는 이름의 차이를 아십니까? 시몬은 일반적으로 인간적 모습의 그를 말할 때 시몬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반면에 거룩하고 변화된 모습의 그를 묘사할 때 베드로라 불렀습니다. 
  
시몬 베드로라고 시몬과 베드로 두 이름을 함께 사용할 때는 인간적인 모습과 거룩한 모습이 함께 보일 때 사용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15, 16, 17절 세 번 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실 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완전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변화된 모습이 보이지 않고 다시 인간적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이전의 육적인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렇게 부르실 때 베드로는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타락하기 쉽고, 원래의 더러운 모습으로 돌아가기 쉬운 것이 인간입니다. 끊임없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동물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타락한 모습은 다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의지와 믿음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누구나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육체의 단련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우쳐줍니다. 고린도전서 9:27에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4:8에는 “육체의 연단을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라고 합니다. 매일 우리의 육체를 단련하고 복종하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영적 사람은 육체를 쳐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 금욕의 고행이 필요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과거 20년 동안 에이즈로 죽은 성직자가 3백 명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육체를 방치하면 누구나 타락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누구나 더러운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1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은 늘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왜 인간은 그렇게 생겼을까요?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악과 더불어 살고 있고, 내 속의 악한 존재가 선한 존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적 단련이나, 육체를 치는 수고나, 영속적 개심이 없으면 저절로 악하게 살게 됩니다. 육체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런 모든 문제는 해결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들의 백합화가 입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가 먹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를 먼저 구하면 물질적 문제, 육체적 문제는 다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장수와, 부귀와, 영화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지혜를 먼저 구하고 지혜 제일로 살아가면 육체의 모든 것은 다 주십니다. 영혼제일로 살아가면 육체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영혼보다 육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예수님께서 비유로 알려 주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많은 수확을 얻은 부자가 곳간을 다시 짓고 잘 먹고 살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영혼을 도로 찾아가면 그 많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결론은 아주 명확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고 합니다. 육체의 관심이 어리석음입니다. 반면에 영혼의 관심이 참 지혜입니다. 
  
우리가 몸의 주인이 되느냐, 몸이 우리의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몸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합니다. 몸짱, 얼짱 사회에서는 몸이 식민화됩니다. 한국의 외모지상주의는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 성형, 미용, 외형 산업이 기업화되었습니다. 운동, 건강, 장수는 이제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기든스는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몸을 디자인할 책임까지 가지게 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육체제일주의, 육체중심의 삶을 살지 맙시다. 육체로 살지 말고 영적 관심, 영적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육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를 닮지 말라. 

요한복음 21:4에는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고 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영적인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나 마음이 육적이란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이 심한 갈릴리바다에서 밤새 노를 젓느라 힘들었던 날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육적인 욕심으로 따라가는 자세, 물질적인 기준, 인간적인 바람을 가지고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예수님이 앞에 계셔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5:8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깨끗지 못한 마음, 육적인 눈을 가지고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마음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자는 아예 하나님을 볼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시체를 숨겼거든 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육적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눈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육의 눈을 가지고는 부활의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전의 육체가 아닙니다. 이제는 시공을 초월하신 영체로 변화하셨습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눈으로 보려고 하니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주실 때“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졌는데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는 과정에서 모압 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땅을 지난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미디안 선지자 발람에게 부탁하여 이스라엘이 그들을 삼킬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발람이 가는 길에 발람이 탄 나귀가 골목길에서 천사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귀가 담장에 비켜서자 발람이 다쳤습니다. 발람이 화가 나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 때 나귀가 말을 합니다. “왜 나를 때립니까?” 나귀는 천사를 보았지만 발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뒤에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발락의 저주를 거절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나귀가 천사를 보았지만 발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짐승도 보는 천사를 사람이 보지 못합니다. 영적인 눈을 가지지 않으면 영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아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됩니다. 메시야이심을 믿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세계 4대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많은 랍비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위대한 교사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사회혁명가라고 합니다. 이런 눈으로는 아무리 예수님을 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분명히 아는 것 같고, 많이 들었고, 많이 보았지만 육적인 잣대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존재는 영으로 봐야 합니다. 
  
1775년, 제퍼슨이 부통령 시절에 볼티모어의 가장 큰 호텔에 수행원 없이 들어갔습니다. 말채찍을 들고 농부차림으로 들어간 제퍼슨을 호텔 매니저가 아래 위를 훑어보고는 ‘방이 없습니다’라고 내뱉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들어오면 호텔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퍼슨은 그 호텔에서 나와서 다른 작은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한 부유한 신사가 호텔에 와서 조금 전 그 사람이 부통령 제퍼슨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매니저는 직원들을 보내 빨리 부통령을 모시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다른 호텔에 투숙한 제퍼슨은 거절하면서 짤막한 답신을 보냈습니다. “주인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농부에게 내줄 방이 없다면 부통령에게 줄 방은 더더욱 없겠지요”. 똑같은 일이 2,000년 전에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왔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빛을 모르다니 말이 됩니까? 빛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환한 게 빛입니다. 그런데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3:6에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합니다. 영으로만 알 수 있는 그리스도를 육적으로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두 단어가 기적입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라는 분이 나의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믿음은 놀라운 영적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성가에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찬양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아는 지식이 신령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있어야 부활하셔서 변화된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참 지식은 영적 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사야 43:8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우둔함을 깨우칩니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영적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신 사건을 보세요. 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화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구약의 대표자인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귀가 없이는 들어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고 믿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스펀지’라는 TV 프로그램이서 실험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거북이와 달팽이 가운데 누구의 속도가 더 빠르겠습니까? 거북이가 훨씬 빠릅니다. 거북이는 시속이 0.27km입니다. 그런데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보면 이런 거북이가 토끼와 경주를 합니다. 토끼의 달리기 속도는 치타와 맞먹는 순간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속이 80km라고 합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처음부터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불공평한 경주가 인생입니다. 결과적으로 거북이가 승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토끼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토끼는 작은 것을 소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태했습니다. 마치 세상으로 향하여 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세상의 눈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의 영화에 삽니다. 결국은 이런 사람은 패배합니다. 절대로 세상에 기웃거리면 안 됩니다. 항상 영적인 관심과 눈을 가지고 살아야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꾸준함이 없이는 어떤 것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재능은 결코 꾸준함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이미 달리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의 경주를 쉬지 말고 달립시다. 세상으로 눈을 돌려 기웃거리지 맙시다. 옛날의 인간적 습관, 육체적 탐욕, 변화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지 맙시다. 영으로 생각하고 영으로 보는 삶을 살아 영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주님을 확실하게 보고 믿고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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