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올바른 선택을 하라! (창 13:5-13)

첨부 1


올바른 선택을 하라! (창 13:5-13) 
 
 
❚믿음과 현실의 차이

우리의 믿음은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 나갔을 때 얼마나 다를까요? 교회 안에 있을 때 은혜 받고, 이렇게 살라고 배웠지만 정작 교회 밖에 나갔을 때 그대로 살고 있는지, 은혜 받은 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배운 대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가 깨달은 대로 살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도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대로 살면 손해 볼 것 같고,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살면 왕따 당할 것 같아서 우리는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책망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교회에서 배운 대로 세상에서 살지 못하냐고 야단치고, 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살지 못하냐고 책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도 제가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성경말씀 그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든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마음으로는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고 싶었지만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잠들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조차 마음으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한탄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하물며 연약한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우리도 세상에서 믿음대로 살고 싶지요. 교회 밖에서도 말씀대로 살고, 배운 대로 살고 싶지요. 그런데 그게 뜻대로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지난주부터 우리는 ‘롯’이라는 인물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롯이라는 인물이 오늘 설교의 부제처럼 죄악된 세상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지난주일 우리는 롯이 아브라함이라는 멘토를 잘 만났다고 했습니다. 삼촌이자 부모 같은 분, 스승이자 상담자, 내 인생을 안내해주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최고의 멘토가 아브라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멘토를 만난 롯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며, 특히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삼촌 아브라함을 통해 롯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이렇게 아브라함 같은 좋은 멘토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영적인 영향을 틀림없이 받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롯이 살아가며 현실적인 선택을 할 때 기준은 완전히 세상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롯은 삼촌 아브라함의 영향을 받아 아주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었지만 정작 세상에 나가 살아가면서 현실적인 선택을 할 때, 즉 결혼할 때, 사위나 며느리를 볼 때, 사업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돈을 벌 때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선택할 때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한 것이지요.

❚복의 근원

그러면 구체적으로 롯이 어떤 선택을 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아브라함 가족과 롯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이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실 때 그대로 순종하면 정말 많은 것을 잃을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정든 고향, 내 삶의 터전인 친척과 아버지의 집, 내게 안정과 편안함을 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하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당장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시고 우리가 포기하고 잃어버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믿음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포기하고 가나안 땅으로 가자 정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십니다.

13장 2절에 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아브라함 뿐 아니라 조카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다”고 합니다. 롯도 역시 복을 받아 삼촌처럼 양과 소가 많아진 것입니다. 부자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이런 특성이 있습니다. 

한 사람만 복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사람까지 영향을 받아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따라하십시오. ‘복의 영향력’이라고 부릅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안 좋지만, 복의 바이러스, ‘행복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아주 강해서 나만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과 자녀와 주변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주변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 많이 받을 뿐 아니라,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주변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만드는 ‘복의 근원’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선택기준의 차이

그런데 이렇게 복을 많이 받는 것은 좋은데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본문 6절에 보면 그 땅이 아브라함과 롯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했답니다. 가진 땅도 좁고 가축이 풀을 뜯을 목초지나 물도 한정되어 있는데 소와 양은 점점 늘어나니 슬슬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아브라함의 가축을 치는 목자와 롯의 목자 사이에 서로 다툼이 일어납니다. 재산이 불어나니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아서 재산이 늘어나거나, 지위가 올라가거나, 세상에서 잘 나가게 될 때,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신문에 미국의 어떤 부부가 2천 억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2천원 아닙니다. 2억도 아닙니다. 2천억입니다.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요, 어떤 복권회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렇게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 중에 거의 절반이 더 불행해졌다고 합니다. 

복권 당첨 후 자살, 이혼, 마약, 알코올 중독, 파산, 감옥행 등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거액이 당첨된 후 일가친척, 친구, 모르는 사람까지 온갖 사람이 돈 좀 꿔달라고 난리겠지요? 단란하던 부부가 돈 때문에 다투게 되지요. 멀쩡하게 일 잘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 되니 놀고먹고 흥청망청하게 되지요.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없던 돈이 갑자기 생기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삶이 풍성해지고 넉넉해지고 편안해 질 바로 그 때, 마귀는 그 편안함, 풍족함을 걸림돌로 삼아 우리는 넘어뜨리려 합니다. 우리는 그 복 때문에 오히려 나태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죄 짓기 쉬워져서 넘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잘 나갈 때 조심하십시오! 복 받았다 싶을 때 더 겸손하고 더 기도해야 합니다. 더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보세요. 그 좋던 아브라함과 롯이, 친 아버지와 아들 같던 삼촌과 조카 사이가 늘어난 재산 때문에 자칫 갈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심각한 갈등의 소지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위기의 순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답게 정말 신앙적인 결단을 합니다. “갈라서자!” 여러분, 갈라서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게 아닙니다. 부부가 갈라서거나 친구가 갈라서면 안 되지만 때로는 서로의 발전을 위해 독립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우리 서로 다투지 말고 이참에 갈라서자. 싸워서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너도 이제 장성하고 재산도 늘어났으니 내 품을 떠나 독립할 때가 됐다.” 자녀를 결혼시키고도 내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미워서가 아니라, 싸워서가 아니라 진정 저 사람을 사랑한다면 독립시켜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9절에 뭐라고 나왔습니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여러분, 이것이 아브라함의 ‘선택기준’입니다. 어떤 기준입니까? 내가 먼저 좋은 편을 택하고 너는 나중에 선택해라가 아닙니다. “나는 어른이고 너를 자식처럼 키워주었으니까 내가 먼저야”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일반저인 기준이지요. 내가 먼저, 내가 더 좋은 것을 택하겠다, 내가 어른이니까, 내가 윗사람이니까, 내가 너를 도와줬으니까... 철저하게 ‘나 우선’ ‘나 중심’의 선택기준 아닙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거꾸로입니다. “너 먼저 선택해라”입니다. “너 좋은 편을 먼저 선택해라. 

네가 좌측을 선택하면 나는 우측을 선택하고, 네가 우측이 좋다면 나는 남은 좌측을 택할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기준과 반대인 신앙적인 선택기준입니다. ‘너 우선’ ‘너 중심’의 기준입니다.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 자식처럼 키운 롯을 위해 끝까지 희생하고 배려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잘 믿는다면서도,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다면서도 현실적인 선택을 할 때 우리가 과연 아브라함처럼 희생하고 양보하고 배려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이 하나님 잘 믿어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을 할 때도 신앙인다운 기준으로 선택하고, 실제 삶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서 그가 진정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요?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현실적으로 아브라함 같은 기준이 아니라 롯 같은 기준으로 선택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롯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첫째, 롯은 배려와 희생의 정신이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본문을 보아하니 롯은 삼촌이 “너 먼저 선택해라”고 하니 아마도 덜컥 저 먼저 선택한 모양입니다. 적어도 나를 부모처럼 키워준 분인데 이러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삼촌이 너부터 선택하라고 해도 사양해야지요. “그래도 저 키워주신 분인데 먼저 선택하세요” 해야지요. 그런데 롯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좀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철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이 있다고 한다면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배려와 희생도 알아야 합니다. 롯은 일단 여기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둘째, 롯은 철저하게 육신적인 안목으로 선택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너무 좋아 보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이 물도 넉넉하고 땅도 비옥하고 너무 풍요로워 보입니다. 그래서 롯은 주저하지 않고 소돔 고모라 지역을 먼저 택합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육신의 안목을 가지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 분명히 뭐라고 했습니까?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롯은 소돔 고모라의 영적인 상태는 안 보고 그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기준만 가지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니 실패하지요. 

창세기 14장에 보면 소돔에 정착한 롯은 여러 나라 왕들의 연합군에게 포로로 끌려가다가 삼촌이 구하러 와서 죽다 살아납니다. 사실 이것은 롯의 육신적인 안목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너의 선택은 잘못 되었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한 롯은 계속 소돔 땅에 눌러 살다가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 때문에 유황불에 멸망당할 때 큰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육신적인 안목으로 인생의 문제를 선택하고,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신앙적인 기준이 아니라 세상적인 기준으로 선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이렇게 뻔합니다,

롯의 이런 육신적, 세상적 안목은 그의 두 사위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망시키실 테니 빨리 피하라는 롯의 경고를 들은 예비 사위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했습니다(창 19:14).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신앙적이고 영적인 일에 대해 농담으로 여기고 비웃는 것을 볼 때 롯이 사위를 고른 기준은 결코 신앙이 아니었고 세상적인 기준, 인물이나 직업이나 가문이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안 믿어도 좋으니 세상적인 조건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반면, 철저하게 신앙적인 기준으로 선택한 아브라함은 본문 14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분명 외적으로 볼 때는 롯이 선택한 지역이 더 풍성하고 조건도 좋은데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지 않은 쪽을 선택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상을 받아 더 잘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지금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철저하게 신앙적인 기준으로 선택하면 하나님이 갑절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결혼이나, 사업, 직장, 출세 등 현실적인 문제를 선택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솔직히 꽤 고민이 되지요. 믿음대로 하려니, 신앙적인 기준을 따르려니 손해 볼 것 같고,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무 고민 없이 가뿐하게 선택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다가도 결국 신앙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는 사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의 진짜 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내가 내 기준으로 알아서 선택하겠다, 이것은 ‘내가 책임지는 삶’입니다. 반대로 나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택하겠다, 이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입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다른지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