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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교훈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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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교훈 (눅 16:19-31)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문제는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관심사입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도 영혼불멸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내세의 실존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안을 내 놓지 못하였고 여러 가지 추측만 낳고있습니다.
 세상에서 인간과 사물이 모두 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것과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라는데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아니고는 그 어떤 대답도 주지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은 짧지만, 죽음 다음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영생의 도리를 밝혀주고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이와같은 인간실존의 절실한 문제에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있습니다. 인간이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면 세상에서 사는동안 가장 가치있고 올바른 인생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하여 주는 교훈이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줄것입니다.

1. 빈부가 섞여사는 세상입니다.

본문 말씀 19절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고 했습니다. 20절에는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여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고 하였습니다.
똑 같은 공간에서 하나는 호화롭게 연락하는 부자요, 하나는 가난하고 병든 거지 나사로가 공존합니다. 이것이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인간세상의 단면입니다. 요즘 흔하게 쓰이는 말로 빈익빈 부익부 이거나 확연하게 들어난 양극화 현상입니다.
 
1)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잠언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여러종류로 다양한 형태의 사물을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삼라만상을 똑 같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크고 작은 것, 거칠고 순한 것, 강하고 약한 것 등 헤아릴수 없이 많은 종류가 공존하게 하였습니다. 

빛과 어둠을 지으시고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획일적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곤합니다. 또 부자는 성공한 자이고 가난한 사람은 실패한 자인 것처럼 생각하기도합니다. 그러나 동서고금 어느 역사에도 부자만 있고 가난한자는 없는 세상은 없었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합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빈부가 섞여 살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십니다. 세상이 사람들의 기준이나 주장에 따라서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여오와께서 온갖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잠16;4) 사람들 보기에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고 오히려 해악만 끼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선한목적에 이바지 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한가지는 부요하고 가난한것과 성공하고 실패한것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요함을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실상은 가난한 자 라고 하였습니다(계3;17) 야고보서1;9-10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하였습니다.
  
2. 두가지 타입의 인생입니다.

여기 어급된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전혀 다른 인생관을 소유한 사람들의 상반된 삶의 스타일을 볼수가 있습니다.
 
1) 자기중심의 사람과 하나님 중심의 사람.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삶의 목표와 가치의 기준으로 여기는 사람을 인본주의자라고 합니다. 빌립보서3;19에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고 하였습니다. 그와 달리 하나님의 요구와 판단에 따라서 삶의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을 신본주의자라고 합니다. 빌립보서3;20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시는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부자의 경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매일같이 잔치를 하는 등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집 문간에 앉아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 먹으며 헨데를 개들이 핥고있는 불쌍한 나사로를 돌봐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야고보서2;15-17에 헐벗고 굶주리는 형제를 외면하는 사람의 믿음은 죽은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나사로의 경우 그런 비참한 지경에 처했으면서도 남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비관하지 않고 인내하며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2) 현세주의와 내세주의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지 못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게됩니다. 로마서1;28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좇아 행동하게 됩니다. 온갖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쾌락과 욕구 충족이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나오는 부자의 경우 잠시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만 있을뿐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는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것을 사모합니다(골3;1-2)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고있습니다(고후4;1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사람들은 한 평생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았습니다. 히브리서11;16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공통적으로 임하는 죽음입니다.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부자도 죽었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똑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죽음은 둘에게 똑 같이 찾아왔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9;27) 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1)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임하게 된 것은 시조 아담의 범죄에 기인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후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죽음을 선고하였습니다. 창세기3;19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역사상 어느 누구도 죽음을 면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유예하거나 또는 피해 갈려고 애를 쓴 흔적은 있었지만 그것을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전도서 3;1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그 목적은 이룰때가 있나니 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으며...” 라고 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이처럼 극명하게 차별화된 생활을 했던 사람도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앞에서는 별수없이 그대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됩니다. 
부자는 막강한 재력으로 어지간한 문제는 쉽게 풀어가거나 피할수도 있었지만 죽음만은 물리칠수 없었습니다. 나사로처럼 가난하고 병들고 비참한 처지의 사람에게 여간한 것은 면제받거나 동정 받을수도 있지만 역시 죽음만은 예외가 되지못합니다. 죽음은 만인에게 공통적인 관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조건이나 환경이 죽음앞에서는 어떤 영향력도 행사 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2) 죽음앞에서 허망한 인생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를 기록하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고 하였습니다(전1;2-3) 그럴것입니다.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이지만 막상 죽음앞에 섰을 때 그동안 그가 누렸던 영광의 극치가 물거품처럼 다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부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잔치하며 즐기던 그 생활은 죽음과 함께 모두 끝나 버렸습니다. 본문 말씀 25절에 보면 살았을때의 부유한 생활이 죽은 다음에 까지 연장될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은 남보다 많이 가진것과 또 화려한 생활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죽은 다음에 까지 연장 시킬수 없다는것에 몹시 안타까와 하곤합니다. 고대 애굽의 황제들이나 중국의 진시왕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가졌던 영화와 권세를 무덤속에 까지 재현 시키려 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것들은 박물관에 진열품으로 남아 있을뿐 죽은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인생을 풀과 같다고 했고 그 영화는 풀의 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하였습니다(사40;6-8)
 
4. 사후 세계의 실제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죽은 다음 사후 세계가 있음을 일러줍니다. 전도서3;21에는 사람이 죽은다음 혼이 위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고전15;20절 이하에는 죽은다음 부활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죽은 다음 인간이 처하게 되는 내세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내 주고있습니다.
 
1) 천국과 지옥의 실상입니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도 죽은다음의 세계를 막연하게 내세 또는 저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지어 각각 천당과 지옥으로 가는곳이 다르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22-23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죽은 나사로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은 낙원에 들어 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던 한편 강도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그 영혼을 의탁할 때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눅23;43) 사도 바울은 계시와 환상을 통하여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낙원의 광경을 체험하였다고 했습니다(고후12;4)
한편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말할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음부를 ‘스올’ 이라고하고 ‘게헨나’ 라고도 하는데 이는 꺼지지 않는 불과 연기가 계속 피어 오르는곳을 뜻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한다고 하였습니다(24-25절) 마가복음 9;48-49절에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간혹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케 되는 등 불공정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내세에서는 그런일이 없습니다. 고후5;10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음부에서 고통 당하는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낙원의 즐거움을 누리는 나사로를 보고 속이 많이 상했을것입니다. 나사로의 손 끝에 물을 찍어 보내서 자기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앗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고 단호하게 거절 하였습니다(25절)
 
그는 세상에 있을 때 나사로가 자기집 문간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해 버린채 자기혼자 연락하면서 즐기고 살았던 일은 잊어버렸습니다. 
성경은 현세에서의 우리의 삶이 내세 곧 영원한 세계를 위하여 준비하는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6;7-8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심고 어떤 것을 거두게 될것인지 생각해 봐야됩니다
 
3) 살아있는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전도서7;2에 보면 솔로몬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 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결국이 이와같이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거기서 삶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배울수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살아 있을 때 어떤 마음가짐과 행동을 해야 될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자기의 다섯 형제가 남아있는데 그들만이라도 이런 불꽃 속으로 오지 못하게 나사로를 보내서 이 곳의 상황을 알려주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나사로가 아니라도 거기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 해 주신 성경 말씀을 의미합니다. 부자는 그래도 죽은자가 살아와서 전해주는 말을 더 믿을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자는 비록 죽었다가 살아난자가 있더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거듭난 영혼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믿고 구원에 이르게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적도 불신하게 된다는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고 인간 실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될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도 전혀 예측할수 없는 순간에 폭군처럼 들이닥치고맙니다.
 
죽음 다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다. 상급과 형벌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엄연한 현실앞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부자와 같은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이 교만하거나 남을 멸시해서는 않됩니다.
나사로처럼 불행하고 힘든 자리에 있더라도 인내하면서 더 나은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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