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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내노라 (요 20:19-21)

첨부 1


보내노라 (요 20:19-21)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1)
<요한복음 20장 19~21절>

할렐루야! 

봄비가 오고 있습니다. 
비 내리는 날을 좋아 하시나요?
오늘 같은 날 부르고 싶은 찬송(183장)이 있습니다.
함께 찬양합니다.

1절. 빈들에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약속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4절. 참되신 사랑의 언약 어길 수 있사오랴
오늘의 흡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기쁨이 넘치고 
행복한 동행의 주인공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걱정이 앞섰습니다.

우리가 성경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고 
‘그런가보다’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치루고 무덤에 장사지내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새벽에 시체를 보러 갔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돌로 닫아놓은 무덤을 누가 열어줄까 걱정하며 갔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굴려 주리요”
이 질문은 슬픔에 잠긴 온 인류의 물음입니다.
인간의 행복, 기쁨, 평안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죽음의 돌문을 누가 옮겨 놓을 수 있겠습니까?
철학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나 사상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해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돌문을 굴리시고 다시 사심으로 
인간이 극복해낼 수 없었던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괴테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득세를 하였다 하더라도
죽은 후 다시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처량한 나그네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도 이 땅의 생활이 끝난 후에 
다시금 부활할 것을 확신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요 11:25~26)

혹시 자녀를 잃은 슬픔으로 나오셨습니까?
부모를 잃은 자녀들, 
남편을, 아내를 먼저 보낸 분들 서글픔으로 사십니까?
이제 모두 눈물을 거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진리를 물질, 돈으로 막으려 하고 
의를 돈과 물질로 사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강합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큰 돌로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가이사의 권력을 표시하는 인봉을 하였습니다.

‘인봉(봉인)’이 무엇입니까?
[봉인: 봉한 자리에 도장을 찍음. 또는 그렇게 찍힌 도장] 
자동차를 구입하면 번호판을 줍니다.
자동차에 번호판을 붙이고 봉인을 합니다.
번호판을 떼거나 다른 차에 달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떼면 범법입니다.

만약에 누가 그 돌을 움직인다면 
로마 “가이사”의 권력에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봉했다”는 것은 가이사의 권력을 이용하여
예수의 부활을 막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있었으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저편의 부활은 
막아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의 힘은 어떤 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교훈인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큰 돌로 무덤을 막고 
가이사의 권력으로 인봉하고
그래도 불안하여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인력으로 예수의 부활을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힘을 가지고도 
예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은 반대자를 가두는 영원한 감옥이 못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 땅위에 언제나 의와 진리가
최후 승리를 거둔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안겨 준 것입니다.
의와 진리는 물량적인 힘으로도, 권력의 힘으로도
인간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명령’,
특별한‘위임(commission)’이 담겨 있습니다.

-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권위 …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권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 28:18~20)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심판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5~16)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고
우리가 그 증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6~48)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지막인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인해 시작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 믿는 성도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었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뜻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 주님 앞에
예수 믿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부르심을 받은 무리들은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안식 후 첫 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마지막 명령을 주셨던 날은 
‘안식 후 첫 날’곧 주일이었습니다.

그날, 주일 아침 일찍 
제자들 중 베드로와 또 한 제자는 비어있는 무덤과 
벗어놓은 세마포를 직접 보았습니다. (요 20:1~8)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기까지 했습니다. (요 20:11~18)

그러나 저녁이 되어도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성경은
“…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요 20:1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제자들은 무섭고 두려워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해도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대 지도자들이 그대로 있었고
로마 통치자와 군인들도 그대로였습니다.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평강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1:19, 2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평강’의 인사를 들은 제자들은
반가웠고 안심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뻐하던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 할 것을 기대하면서
평안을 되찾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당황스런 말씀이었습니다. 
현실적인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나가라’는 명령에 제자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는 행동하는 자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보다,
그들을 다시 보내셨습니다.
이유는 복음은 문을 꼭 닫고 모여 있는 
제자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전해져야 하는 것이고
복음은 확장되어야 하는 소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여기 있지 말고 나가서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행동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시작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에게(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친구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처럼 좋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렘브란트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묻기 전에 
일단 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하면 되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너무 망설이며 쭈뼛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신중하게 탐색하며 준비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시작하는‘용기와 행동’입니다. 

교회의 사명 … 성도의 사명인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야 합니다.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교통안전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운전면허 취득자의 65%가 
실제 운전을 하지 않는 이른 바‘장롱면허’취득자라고 합니다.
면허를 따고 운전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초보 때 겁이 난다고 운전을 기피하면
영원한 장롱면허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매일경제신문, 2006. 8. 18. / 문화일보 2008. 12. 3. 38면. 참조]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는 순간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전도 면허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 면허증을 썩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얻은 사람들이
복음서에만 40명 가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34명은
친구나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혼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단지 6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먼저 아는 사람이 그들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 전도하나요? 

허브 밀러(Herb Miller) 박사의 책
『아스팔트 위의 낚시질(Fishing on the Asphalt)』을 보면
미국의 경우 보통의 기독교인들이 
6천 번 설교를 듣고, 8천 번 기도하고, 2만 번 찬송하지만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신비가 있다고 합니다. 
- 첫째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 둘째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예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지 않으면 …
부활하신 예수님을 장롱면허처럼 묻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서 … 
최선을 다해, 기회 있을 때마다 예수를 전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게 해야 합니다.
존 채프먼(John Wilbur Chapman, 1859~1918) 목사님이
한 집회에 모인 4,500명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모인 사람들 중에는

10살 이전에 신앙을 가진 사람이 400명
10~14살 사이에 신앙을 가진 사람은 600명
14~16살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400명
16~20살 사이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1,000명 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안정 되고 가정을 꾸렸을 때 …
즉 36세 이후에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작 24명에 불과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선하신 하나님”참조>

나이가 들어서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는 것이 이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마음이 생겼다면 …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

지금 당장 해야 하고 누구에게든 전해야 하지만
나이 어린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나이 들어 마지막 순간에 숨을 거두기 전에
‘예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도 귀합니다.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중환자실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숨만 쉬고 있어도
귀는 듣는다고 합니다. 그때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예수를 영접하면 오랫동안 헌신하고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청년, 중고생, 초등학생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오랜 세월동안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면 
때를 미루면 … 늦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예수를 믿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는 의무에 충실해야 …

우리가 열심히 맡겨진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순간
우리에게 중요한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자녀가 누구입니까?
아버지의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자식은 특별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다 내어줍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것, 어머니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 그런 권리를 주셨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저는 토요일이면 주일에 입을 양복, 셔츠, 넥타이 … 등을 
미리 챙겨 걸어놓습니다.
주일아침이 되어 샤워를 하고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려고 보았더니 어제 빼놓은 넥타이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그날 그 양복에는 그 넥타이를 매야 어울리는데 …
찾다찾다 없어서 다른 넥타이를 매고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 와봤더니 제 아들 전도사가 그 넥타이를 매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것이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권세, 권리, 특권, 자격을 지켜갈 줄 알아야 합니다.

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어기는 것 ‘범법죄(Sins of Commission)’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법이 요구하는 것을 하지 않는 죄 …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하지 않는 
‘무시하는 죄(Sins of Ommission)’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생활을 위해 무엇을 하지 말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보냄을 받은 성도라면 …
명령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지 말까’를 생각하기보다
부모님을 위해, 자식을 위해, 남편, 아내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까’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2000년 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접어두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인터넷으로, 스마트폰으로 
기둥교회 예배에 접속한 여러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직업을 통해서 …
내 가정을 통해서 …
내 상황들을 통해서 … 영혼을 건지고 싶어 하십니다.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향내를 풍기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내를 풍기며 사십니까?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 냄새를 풍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 이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라고
코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머물게 되는 그곳이 어디든지,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지 
‘내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간다면
함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보내신 분’앞에 갔을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는 자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믿는 자가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보내셔서 부활하신 예수를, 
구원의 길을, 천국을 전하라고 명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 세상을 향해 나갈 때 
빛 되고 소금된 삶을 결단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고 구원의 길이 되어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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