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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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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7-10)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경의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예수님 이야기는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세상에 보내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 들었던 말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당신 스스로 당신에 관해 말씀하신 이야기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뜻으로 사역하셨는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역하셨는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셨는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는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소개하시며 선포하신 내용들 중 7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나는 참포도나무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려면 이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이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잘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들 가운데 세 번째 자기 선언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스라엘이 목축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양을 칠 때 사용했던 우리에 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종류의 양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사는 마을에 있는 우리입니다. 대체로 마을마다 공동 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목자들이 문지기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산이나 들판에 있는 우리입니다. 목자가 마을에서 먼 산이나 들판에서 양을 칠 때, 밤에 양들을 보살피기 위해 야외 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산이나 들판에 있는 우리는 제대로 지어진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울타리는 있어도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양들을 우리로 불러들인 후 목자가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누워 쉬면서 문 역할을 합니다. 이 우리에서는 바로 목자가 곧 양의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목자이심과 동시에 양의 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안정된 마을의 우리 상황이 아닌 산과 들에 있는 야외 우리의 상황에서 양의 문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양의 문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일까요?

1. 함께하심

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양들이 목자를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목자 아닌 사람들이 양을 불러도 자기를 보살펴주는 목자가 아닌 줄 알고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들이 어떻게 목자와 다른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까요? 간단합니다. 목자는 늘 자기들 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산으로 들로 유목을 위해 길을 나섰을 때, 목자는 종일토록 양들과 함께 합니다. 한 밤 중에도 야외 우리의 문이 되어 자기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목자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목자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목자가 늘 자기들 곁을 지키며 보살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목자가 한 밤 중에도 양 우리의 문이 되어 양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목자가 늘 양들 곁을 지키며 양떼를 보살피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 곁을 지키시면서 주님의 백성들을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마 9:3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주님의 눈에 주님 앞에 모여온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험한 인생길을 외롭게 홀로 걷고 있습니다.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목자 없는 삶입니다.

한 미식축구 감독이 있었습니다. 2년 째 계속 성적이 부진합니다. 매스컴도 외면하고 인기도 떨어집니다. “도대체 성적이 그게 뭐냐?”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저 사람 곧 해고 될꺼야!”라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친구들도 떠나가고 주변에 그 누구도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비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자기를 반겨주는 것이 꼭 하나 밖에 없더랍니다. 새끼 때부터 길러온 개만이 여전히 꼬리를 치면서 자기를 환영하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자기 부인까지도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인생에서 나는 정말 내 마음을 알아주고 외로움을 알아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 하나를 발견했소. 내가 이런 일을 당해보니까 정말 이 개 밖에는 나의 친구가 없소” “내가 이런 친구를 또 하나만 더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 나갈 수가 있을 것 같소”하면서 부인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웃더니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러더랍니다. 아내가 밖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답니다. 이 사람이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내가 개 한 마리를 더 사가지고 왔더랍니다.

사실 오늘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병이 많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 ‘은둔형 외톨이’가 많습니다. 불안해하며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답니다. 이런 사람들이 10-30대에 무려 20만-30만 가량이나 된답니다.

일본은 이런 마음의 병이 우리 보다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말로 이런 사람들을 ‘히키코모리’라고 한답니다. 이들이 120만 명이나 된답니다. 
곁에 그 누구도 없어서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성경적으로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야 말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 그들 곁에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지친 손을 잡아주시고, 그들의 기진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셔서 여러분을 안아주실 것입니다.

2. 보호하심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 양의 우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 옛날 노아 홍수 때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 가족들과 동물들이 특별한 보호를 받은 것처럼,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양은 정말 연약한 동물입니다.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이나 사슴처럼 잘 도망치지도 못합니다.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눈에 잘 띱니다. 바늘처럼 생긴 털이 있는 고슴도치나 고약한 냄새를 가진 스컹크처럼 자기를 보호할 방어수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눈이 좋거나 냄새를 잘 맡아 맹수들을 먼저 발견하여 숨지도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런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너무도 연약하여 쉽게 쓰러지고 쉽게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양의 문이 되셔서 보호해 주시고 돌봐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번 중국선교여행 중 운남성 리장을 찾았습니다. 운남성에서 가장 복음화가 잘 이루어진 리수족 교회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인 나시족의 복음화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리장에서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리장은 지난날 ‘차마고도’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차마고도란 중국 운남성에서 생산된 차와 티벳 고원의 말을 물물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옛 길을 말합니다. 운남성 보이현에서 생산된 차가 이곳 리장에서 티벳 말과 교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리장은 거대한 시장이 서고, 차마고도의 본격적인 출발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차마고도를 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마방’이라고 부릅니다. 이 마방들은 차를 말에 싣고 험산준령을 넘어 티벳의 라사까지 그리고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까지 오고갑니다. 보통 한 번 길을 나서면 가는데 석달, 그리고 오는데 또 석달 긴 기간이 걸립니다.

이 때 마방들은 오직 말을 벗 삼아 말과 동고동락을 합니다. 그래서 마방들은 말과 생사를 같이하기 때문에 때로는 말을 가족보다도 귀하게 여깁니다. 주목할 것은 이 마방들은 말에는 짐 만 싣지 힘들어도 절대로 말을 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이 배고플 세라 목이 마를 세라 세심하게 살펴줍니다. 물론 병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서 보살핍니다.

대개 말이 세 살이 되면 서서히 차마고도 여정에 나섭니다. 그리고 말이 서른 살 정도까지 살게 되는데 그 때까지 함께 하면서 보살피고 돌보아줍니다. 그야말로 말의 한평생을 보호자로서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말이 죽으면 정성껏 장례도 치른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마방들의 애환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마방과 말의 깊은 정 때문에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마방과 말의 관계가 바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사는 날 동안 우리 평생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믿고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갈 때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건강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가 가정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사업과 직장도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3.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심

본문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들이 양의 문 안에 거하게 되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외의 양 우리에서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들을 방목합니다. 한 마리씩 불러 몸 상태를 살펴보고는 우리 밖으로 내 보냅니다. 다 우리 밖으로 나가게 되면 양들을 이끌고 푸른 초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갑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풀도 뜯고 물도 마실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양들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목자가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목자만 따르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양의 문은 입구임과 동시에 출구라는 것입니다.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목자를 따라 양의 문 밖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서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 주는 또 하나의 약속입니다. 양의문 안에 거하는 양들에게 생명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양의 문을 통해 나아가는 양들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 삶이 풍성해 집니다. 먹고 마시는 생존의 염려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땀 흘리고 쩔쩔매며 노력한 것보다 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 조금은 엉뚱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종교활동을 하면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준다”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다니거나 신앙생활을 하면 경제적으로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시간을 빼앗기지 또 헌금해야지 이래저래 경제적으로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미국 MIT 경제학교 조나단 그루버 교수가 2005년 10월 25일 전미경제연구소(NBER)에서 <종교 시장 구조와 종교 참여 및 그 결과 : 종교는 유익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배출석률이 2배가 되면 가계소득이 9.1% 증가하거나 복지지원을 받지 아니하고 자립기반을 마련하게 되고 이혼할 확률도 4%가 줄어든다.”

그루버 박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은 노동시장에서 성공을 방해하는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정신적 중압감이 덜하기 때문에 더 성공할 수 있다. 신앙심이 강해질수록 일상의 문제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어들기 때문에 교회에 자주 가는 사람은 노동시장과 결혼시장에서 성공하기 쉽다”

그루버 박사의 연구 분석은 일리가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정신적으로 평안한 가운데 일을 하기 때문에 결과가 훨씬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하면서 지출하는 경비를 상쇠하고도 많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창 26장에 나오는 이삭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 그 삶에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그 삶이 더욱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팠는데 거기서도 또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의 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인도를 따라 무엇인가 땀 흘려 수고할 때 풍성하게 얻게 됩니다. 주님 주시는 복 안에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문 안에 들어가게 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또한 주님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양의 문 되시는 주님 안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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