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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 (엡 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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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 (엡 2:11-16) :: ::  

어떤 분이 서예를 배우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서예는 조화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쓰다가 잘못되면 서예의 특성상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글자를 통해서 그 실수를 보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획을 쓰다가 좀 뉘어지면 다른 획을 세워서 그 획에 잘못된 것을 고칩니다. 이렇게 잘못된 한 획 한 획이 모여 온전한 한 글자가 됩니다. 글을 쓰다가 한 행이 잘못 되면 다음 행으로 보충하고, 한 연이 잘못되면 다음 연에서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집니다. 부분 부분이 모두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보다 이렇게 실수와 실수, 거기에 대한 보상과 보충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글은 훨씬 정감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각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완전해져 교회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어쩌면 세상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지고, 실수투성인 인간들의 집합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실수 인생들이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데서 교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에베소는 로마제국 내에서는 아주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에게해로 열린 항구도시이고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로마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의 건축물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종교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에 세워진 교회는 당연히 유대인이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유대인들도 있었고, 헬라인과 로마인 등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그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다양한 인종과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에베소 교회는 서로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에베소서 2장 11절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뜻일까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들의 상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11-12절을 읽어보면 에베소 교인들의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을 ‘육체로는 이방인이고’ ‘할례를 받은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못한 자라고 불려졌고’ ‘그리스도  밖에 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에 있어서는 외인이었고’ ‘세상에서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과거에는 언약과 관계없는 이방인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그 때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뒤이어서 ‘이제는’이라는 대조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또 ‘멀리 있던 너희가’라는 표현이 있고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멀리’와 ‘가까이’라는 표현은 거리적으로 멀다, 가깝다의 표현이 아니라 관계적인 면에서 멀다, 가깝다는 뜻입니다. 분열되고 반목을 하던 관계에서 하나가 되어 화목한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4-16에 어떻게 관계가 가까워지게 되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라고 소멸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둘’이라는 표현과 ‘하나’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표현들을 통해 서로 달랐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 중간부터 보면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새 사람’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새롭다’라는 말은 헬라어 ‘카이노스’(kainos)라는 말로 처음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처음의 상태는 창조될 때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처음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동행하는 관계였습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관계였습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잘 관리하고 돌보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원망합니다. 서로 다투고 죽입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로 갈라지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분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처음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바울은 19절에서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권속’이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과 관심, 서로 돌봄, 편함 등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는 서로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한 특성으로 가족 공동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담을 쌓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간에 있었던 담을 허물어 하나가 되게 하는 종교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모습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있었던 가장 큰 편견 세 가지는 유교문화권 아래 오래 동안 지속되어 온 남녀의 성 차이에 대한 편견, 다음으로 신분에 대한 편견, 그리고 지방색의 편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편견을 무너뜨린 한 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금산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우선 ‘ㄱ’자 건축으로 유명합니다. 남북으로 다섯 칸, 강단에서 동으로 다시 두 칸 집을 덧붙여 27평의 건물을 1908년 4월 4일에 헌당하여 지었던 것입니다. ‘ㄱ’자는 남녀를 구별하여 커튼을 치고 서로 눈길을 주지 않고 예배하기 위한 구조였던 것입니다. 유교의 영향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점진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커튼을 걷었습니다. 그것이 1920년이었습니다. 첫 번째 편견 남녀의 차이를 극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던진 더 큰 감동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태어난 이자익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친척집에 가서 머슴 노릇을 했지만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이 많이 나는 김제라고 하는 곡창지대의 어느 부자 집을 찾아가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다’ 고 사정했습니다. 집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집의 머슴으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때에 미국에서 최의덕이라는 선교사가 김제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이 최의덕 선교사가 이자익이란 머슴 청년을 전도했고, 그의 집 주인 가족까지도 전도하여 모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글을 모르던 이자익은 주인 아들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들으며 글자를 익혔습니다. 

이제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금산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인 조덕삼과 머슴인 이자익을 교회 영수 곧 지도자로 임명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최의덕 선교사는 선교 활동 반경이 넓어져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자익 청년을 조사로 임명하여 설교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자익 청년이 머슴으로 있던 집 주인인 조덕삼 영수는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조사가 된다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라고 말하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강단 아래에서 그의 설교를 들으며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1908년,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이 나란히 장로 후보로 나왔습니다. 투표 결과 이자익 영수는 장로로 피택되고, 조덕삼 영수는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조덕삼 영수가 일어서서 ‘여러 교우님들,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려운데,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참 잘하셨습니다. 우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교회를 잘 섬깁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1년 후에 조덕삼 영수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자익 장로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 장로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정성껏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이후에는 자신이 세운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해서 목회를 하고 자신은 장로로 열심히 목회를 도왔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 머슴인 이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큰 복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교회는 신분의 편견과 지방색의 편견의 벽을 보기 좋게 허물어 버리는 기적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은 믿음의 사람들의 참된 교회 공동체상입니다. 

그런데 더 큰 감동의 사건은 그후 2005년 4월 29일에 일어납니다. 대전 신학교에서 이자익 목사님의 전기 출판식을 갖던 날, 강당에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조덕삼 장로님의 손자로 금산교회 장로이면서 국회의원과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 장로님이 축사를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인사말을 한 분은 이자익 목사님의 손자인 이규완 장로님입니다. 그 분은 저의 모교회이고 제가 자란 대전제일교회의 장로님이십니다. 에너지연구소 부소장을 지내고, 카이스트대학 고분자 화학 교수를 퇴직하고 지금은 중국 연변과기대에서 봉사하고 계십니다. 

그는 조세형 장로님 앞에 먼저 머리 숙여 인사를 한 후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주인을 잘 만나셨습니다. 만약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다면 우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 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적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지역의 편견과 신분과 계층의 편견과 갈등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분열과 미움을 만들어 내는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그 분열과 미움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와 화목으로 만들어가는 피스 메이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인데 우리의 가정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정인 교호에서 화목의 사람들로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삶의 영역을 화목의 영역으로 만들어 가기 원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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