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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 되게 하소서 (요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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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하소서 (요 17:20-26)

몇 주간에 걸쳐 광고하던 전교인 수련회가 이번 주말로 다가왔습니다. 준비위원들은 매주일 모여 상황을 점검하고 준비위원장님은 직접 수련회가 열리는 기도원을 방문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고 상을 풍성하게 차려 놓아도 오시지 않으면 준비하는 사람들이 맥이 빠자기 마련입니다. 광고 시간에 준비위원장이 말씀하시겠지만 우리가 가는 곳은 보통 생각하는 기도원이 아닙니다. 숙박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리버사이드 카운티에 있어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정성껏 준비했으니 많이 참석 바랍니다. 아직까지 참가신청하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준비위원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차편이 문제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번 수련회 주제가 “우리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하나 됨’을 주제로 계속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 되는 것이 경험적으로 보아도 쉽지는 않습니다. 동기가 다르고 목표가 다르고 접근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강제적인 연합은 오히려 문제만 더욱 키울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하나 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살아가고 부대끼는 가정이나 교회는 어떠합니까?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모든 교우들이 주 안에서 진정한 일치와 연합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일명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립니다.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온 백성을 위해 기도하듯,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남게 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간절한 소원을 알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은 영생을 주시는 권세자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요, 하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의 중보자이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믿게 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임을 세상에 알게 되기를 바라시고 그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간구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나 됨과 관련된 주님의 명령이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요한복음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네 번 나옵니다.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새 계명을 처음 언급하실 때는 예수님이 잡히시는 밤이었습니다. 죽음이 엄습해온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제자도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서로 사랑하는 여부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죽음이 임박한 줄 아시고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셨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는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 

이에 베드로는 말도 안 됩니다. 내가 왜 지금은 따라 갈 수 없습니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장담은 했지만 주님은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과연 주님의 말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데 제자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좇을 정도는 아직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제자도는 ‘열매 맺기’로 더 구체화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도록 제자를 택한 목적은 그들이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 포도나무인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가 내 안에 온전하게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 거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일입니다. 곧 땅에 떨어지는 일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이 세상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은 자기 생명 지키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한 방법이고 제자들이 지금은 따라갈 수 없으나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 마침내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전부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의 정점에서 지고한 사랑을 계시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 사랑을 계시한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 부르십니다. 친구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써 지고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물론 목숨을 버리는 일은 끝이 아니고 부활로 연결되어 많은 열매를 맺고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아들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고,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아들의 계명을 지킴으로 아들의 사랑 안에 거합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아들이 주신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말씀과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버지 및 아들과 하나가 되어 아들의 본질을 알고 아들을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을 때 자기 백성이 알지 못했지만 이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아들을 알고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된 사람들, 다시 말해 독생자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아들과 아버지를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아들과 아버지는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서로 사랑하기’는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는 일이고, 꺼져버린 사람들의 빛을 밝히는 일이며, 사람들이 잊어버린 하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일이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분열, 갈등, 대립의 어두운 생활을 청산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선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도 자연히 하나가 됩니다.   

하나 됨에 근거: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 3:34)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실 때 펄쩍 뛰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이죠? 목수의 아들 주제에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사용하십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자는 보냄을 받은 자와 하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버지는 보낸 자요 아들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5:26에 의하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보낸 자요 성령님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아들과 성령은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입니다. 여기서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

LA 한인회장 선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자격 시비 논란이 그치지 않습니다. 선거관리 위원회도 누구 편인가에 따라 잣대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선출되면 무엇합니까?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니 손가락질만 당할 뿐입니다. 그래도 회장이 되었을 때 생기는 떡고물을 생각하면서 서로 하겠다고 계속 싸웁니다. 왜 하나 되는 것이 어렵습니까? 


- 욕심 

사탄에게 미혹되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같이 되어 보겠다고 먹었는데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아담이 범죄 한 후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였으나 죄를 짓고 나니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 사실은 악에 대하여 눈이 떠진다는 것입니다.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인하여 마음이 거리끼니 하나님의 낯을 피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이 됩니다. 전에는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보니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뇌와 불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아담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하던 감격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아담의 말을 듣는 하와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아마 그날 밤 엄청나게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 깨지니 다른 사람들과의 하나 됨도 깨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이런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는 마음, 남보다 뛰어나 보려는 마음,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이런 욕망이 하나님을 깨뜨립니다. 사탄이 그들의 욕심을 부추겼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면 하나 됨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겸손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 교만 

바벨탑을 쌓는 것이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바벨탑을 지음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습니다. 성과 대를 하늘에 닿도록 높이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습니다. 다수가 모여 하나가 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자기들끼리 힘을 합치려고 하였습니다.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 됨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 됨의 동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라면 그 하나 됨은 도리어 깨어져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내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했습니다. 사탄이 그들의 교만을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 됨을 파하고자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땅에 흩으셨습니다. 악하고 불순한 동기로 하나 되고자 함은 자신과 공동체를 망치는 지름길이 될 뿐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하여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 영혼 구원

3년의 공생애를 마친 후 십자가에서 달리는 것을 목전에 두신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는 9절에 따르면 “내게 주신 자들”이었습니다. “내게 주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의 백성’을 말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그들도 서로 하나 되기를 바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께 많은 것을 요청하고 기도했으나 마지막에는 당신의 백성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은 바로 당신 백성의 하나 됨이었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하나 됨’을 그렇게 소망하셨을까요? 세상 사람들을 향한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승 없이 홀로 남겨질 제자들을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7:15)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제자들이 보전되기를 구하셨을까요? 

아버지께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고 다음은 제자들이 전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머물며 세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는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사명이란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믿게 하고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이익과 영광을 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도 욕을 먹고 전도의 문이 막혀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기도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의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면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 되는 비결

그리스도인이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방법과 과정이 옳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힘을 한데 모으는 획일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연합이 잘못되면 그 공동체를 통하여 바벨탑을 쌓는 결과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창세전부터 보여주셨던 그 사랑이 있고 또 그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허락했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부족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세상의 조직처럼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한 교회나 단체, 작게는 가정까지도 살펴봅니다. 과연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까?  그저 서로 모여 즐겁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들의 성취욕을 채우려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어떤 일의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동기나 과정이 또한 중요합니다. 주 안에서 어떤 일을 해나갈 때 함께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항상 돌아볼 줄 아는 사랑과 겸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자세는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도 해당됩니다. 그래야 교회나 가정이 하나 되고 화목하게 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제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한다면 기쁨이 없어집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기분이 나빠지며 하던 일에 의욕을 잃지는 않습니까? 나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혈기를 부리다 공동체를 긴장으로 몰아넣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의 존재를 은근히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열심만 가진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하려는 일의 취지가 아무리 좋고 선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본받아야할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세상에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무력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신을 철저히 낮추신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가 지금 우리의 구원입니다. 희생이 없는 섬김은 참된 섬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품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겸손과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하여 자기 것을 버릴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남의 필요를 알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것처럼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비운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기만 하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소중하며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이 피흘려 사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 성령으로 충만해야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생동감이 넘치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음식을 먹고”(46절) 하면서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도들은 열심히 가르쳤기에 배우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교제에 힘쓰고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며 섬기기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하며 전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2:43절에는 사도들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합니다. 42절에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친 자들이 아닙니까? 혹시라도 잡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 비겁한 제자들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오순절 한 곳에 모인 사도들이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그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국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다른 언어들을 말합니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교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탑을 쌓았던 사람들을 온 땅에 흩어버리고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여 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는 혼돈된 언어가 서로 통하게 되는 기적이 벌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였기에 말씀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이었습니다. 그 결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이 하나 됨과 기쁨의 핵심이요 비결입니다. 

스가랴 4:6절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열흘 동안 간절히 기도에 힘썼습니다. 결국 성도의 성령 충만은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내용은 일치와 연합과 하나 됨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그만큼 하나 됨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실천하기 원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아름다운 교제와 사랑과 나눔, 연합과 하나 됨이 저희 교회의 모습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아름다운 변화의 삶을 온전히 회복하며 교회에 부흥과 성장이 일어나기 원합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교우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귀한 부모, 귀한 부부, 귀한 자녀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주 안에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여 복종하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생명 바쳐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

랑과 복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다 요구되는 것은 서로를 향한 관심과 헌신입니다. 서로 복종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직 함께 있을 때, 건강 있을 때, 아내와 남편이 서로 아끼고, 서로 참고, 서로 섬겨야 합니다. 

또한 함께 섬기고 사랑을 나누는 귀한 교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직책이나 특정한 교회 구조가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된 것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섬겼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하고 자연히 양적인 성장도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하나님이 복 주시는 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같습니다. 

교회는 하나 됨을 깨뜨리려는 위협과 도전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초대 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그 다이내믹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시고 그 기쁨과 능력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까지 흘러 넘쳐 아름다운 열매들을 풍성히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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