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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아름다운 사람들 (행 2: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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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사람들 (행 2:43-47)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에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 종교는 퇴보하고 있는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 그 자체인 이 땅의 어린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18: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굳어지고 또 굳어진 우리 마음이 이 예배를 통해 조금 말랑말랑하지만 탄력 있게 변화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도처에서 공격받고, 또 조롱거리로 변한 세상에서 우리는 교회설립 104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면서 1부터 104까지 천천히 헤아려보았습니다. 그 긴 세월의 갈피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기도 소리도 들리고, 찬양 소리도 들리고, 탄식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얼굴들도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세월이었지만, 참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전쟁과 근대화시기를 거치면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분투한 시간이 떠올랐고, 급격하게 도래한 소비사회를 맞이하면서 교회들이 어떻게 변해갔는가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선배들이 눈물로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걷고 있고, 또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도달한 지점은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의 꿈’입니다. 그 꿈은 우리의 꿈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통해 꾸시는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사람들 앞에 고백하지 못합니다. 손가락질 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왠지 싸구려 취급을 당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이게 우리의 슬픔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가장 추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며칠 전 피처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필 주커먼이 쓴 <<신 없는 사회>>를 읽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스칸디나비아의 두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이 어떻게 비종교적인 사회로 변모했는지, 그러면서도 어떻게 안정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동시에 세속적인 국가입니다. 물론 아직도 교회세를 내는 이들이 많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하고 결혼식과 장례식을 교회에서 행하기도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가 한 일화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검사로 일하는 크리스티안은 저자에게 자기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몇 해 동안 친밀하게 만나왔던 친구가 어느 날 파티에서 포도주를 어지간히 마신 후 고백할 것이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했습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안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당혹스러워하는 그에게 친구가 말했습니다. “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줘.” 그는 포도주의 힘을 빌어 ‘신앙’이라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것입니다.(필 주커먼, <<신 없는 사회>>, 97쪽)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미구에 이런 상황에 이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이지, 예수를 ‘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의 대형교회를 방문했던 외국학자가 예배 전후 교인들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본 후에 했다는 말이 참 뜨끔합니다. “한국교회에 열熱은 있는 것 같지만 빛은 없는 것 같다.” 조금 성급하고 오만한 판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또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 비스듬히 기대어

이런 상황에 몰리면 근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떠나온 지점이 어디이고, 가야 할 곳이 어딘가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정신’입니다. 예수 정신이 살아있다면 가장 작은 교회라 해도 작지 않지만, 그것이 사라졌다면 아무리 큰 교회도 교회가 아입니다.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을 보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2: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제화된 신앙, 그릇된 권위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는 허물어져야 할 성전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사해의 동쪽 언덕 마케루스 산성에 수감되어 있던 세례자 요한이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11:3) 그 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려면 그의 자기 진술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그가 일으키는 물결/무늬, 혹은 사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벌어진 사건은 무엇입니까?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생명 회복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벗들은 사회의 유명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성전 체제의 대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들풀처럼 짓밟히고, 천대받고, 상처투성이가 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고, 또 그들은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예수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점잖고 높으신 분들의 잔칫자리는 서열에 따라 배치되었고 지켜야 할 격식과 예절이 엄연했지만, 예수의 벗들이 벌인 잔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비난하며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11:19)한 것도 이해할만 합니다. 주님은 이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의 식탁에서는 누구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고, 마음껏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식탁에 동참한 이들은 모두 벗이었던 것입니다. 그 잔치를 통해 가혹한 로마 제국의 수탈과 종교적인 차별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던 사람들의 마음은 치유되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그들은 우정과 나눔에 바탕을 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비록 가난할망정 함께 나눌 때 삶이 축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숲 속의 빈 터 같은 사람이 된다면 더 좋겠지요. 저는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생명은 그래요/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보세요”. 시인은 우리가 기대는 데가 참 많다면서 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예수는 사람들이 지친 마음을 기댈 언덕이었고, 쉼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가면 우리도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고 쉼터가 될 수 있습니다.

• 아, 참 멋지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기만 합니다. 성령 강림절 이후,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이 땅에 실현된 천국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누가는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그 모습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요? 저들의 삶은 서로의 차이를 넘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표징입니다.

요한복음은 신앙 공동체의 세 가지 표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 일치, 거룩함이 그것입니다. 저는 사랑이란 ‘자기 초월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 크게 기뻐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5). 초대교회는 그런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일치는 모두의 차이를 없애고 획일화할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꽃동산을 이루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이 보여주는 빛깔과 모습을 함께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이것을 일러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조화를 이루되 똑같아지지는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성도들의 일치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 그들은 그 마음으로 형제자매를 대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은 세상적인 가치와는 구별되는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비춰주시는 빛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 빛으로 보면 세상에는 하찮은 것도 없고,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일상의 매 순간을 성사로 경험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랑, 일치, 거룩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교회였습니다.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모두가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가르던 사회적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사심 없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참 놀라운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한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합니다. 연루되기를 꺼립니다. 그것이 야기하는 불편함이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귐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가장 값진 은총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을 경축하는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우리 삶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런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한달음에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해도, 마음을 열고 노둣돌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선교, 매력의 감염

성도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 낯설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가혹한 세금 정책으로 말미암아 기아선상에 서있던 사람들이 삶을 함께 경축한다는 것, 더 어려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밥 한 숟가락을 덜어내며 산다는 것,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품어 안고 산다는 것…. 인간다운 삶이란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는 세상은 병든 세상입니다. 주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이나 21세기의 오늘이나 상황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상위 1%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11.5%를 소유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1995년 이후, 소득 불균형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소득의 불균형이 심화된다는 것은 새로운 신분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공적인 이익보다는 사적인 이익에 집착하게 됩니다. 부정의가 심화되면서 사회불안도 증가합니다. 뭔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해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자체 확장을 위해 빚을 내 땅과 건물을 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교세 확장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교회는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질적 복과 평안을 약속하는 것이 과연 복음일까요? 저는 그것이야말로 ‘다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혈과 육을 예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도록 이끌지 않는 교회는 예수의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바로 이런 딜레마에 처해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독점과 지배와 풍요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과 청빈함이 오히려 삶을 축제가 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47)

산 위에 있는 마을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참된 교회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세속적인 행복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맛보게 하고,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가는 길벗들을 만나 외로움을 벗어버릴 수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교회, 마치 뿌리 뽑힌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주는 교회 말입니다. 김준태 시인은 <고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향에선 눈감고 뛰어도/자빠지거나 넘어질 땐/흙과 풀이 안아준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고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4년이라는 간단치 않은 역사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교회가 되라고. 이 명령에 철저히 순복하여 스스로에게 복이 되고, 이웃들에게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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