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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치시고 먹이시는 예수님 (마 15: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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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시고 먹이시는 예수님 (마 15:29-39)


A. 많은 장애우들을 고치신 예수님(:29-31)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고 성장하면서 10cm밖에 안자란 팔다리로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겼으며, 초·중·고를 거쳐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를 졸업하면서 총장으로부터 '장애물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공로'로 특별상을 받아서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는 "단순한 신체적 특징일 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팔다리가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기에 앞으로 장애 극복을 위해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Barries Free)'에 매진하겠다고 피력했습니다. 그의 삶을 대하는 자세는 세계 모든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본문에는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말 못하는 사람과 각종 장애인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니 예수님이 모두 치유해주셔서 관중들이 깜작 놀라,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장애인들을 치유하시면서 시작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직접 장애인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선교를 장애인 선교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중에 장애인 사역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1.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와 그 당시 잘못된 전통에 매인 장로들과의 충돌(마 15:3) 

예수님께 고침받고 구원받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긴장을 했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장로들의 잘못된 유전을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에 장애인 선교의과제가 있습니다. 

"너희는 왜 전통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우리 주변의 많은 장애인들이 우리의 잘못된 부정적 의식 때문에 사회에 적응도 못하고 복음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장애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무관심 때문에 그들 삶 전체에 치명적 상처를 주는 사회적 장애를 맛보며 좌절합니다. 우리 공주에도 많은 장애우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저들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받아 영생을 얻고 밝은 삶을 살아가도록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하나님이 관심가지시고 기뻐하시는 일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 장애자녀들을 데려온 부모들의 믿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과 구원을 받도록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우리 지역 사회의 장애인들로 하여금 이 믿음의 길을 걸어 영생을 얻도록 하여야 합니다. 천국에는 장애·비장애 구별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믿음의 가족들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장애도 이 믿음만 있으면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3. 장애 그리스도인들을 양육시켜서 장애인 전도자로!(마 15:31) 

함께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에 동참하고 영광을 돌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안식일에 고침 받은 소경 사건이나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복음전도의 기회가 된 것 같이, 장애인 전도는 장애인 크리스쳔이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 치유의 은사가 재활로 나타나 소망을 가지고 성숙한 신앙의 반응자들로 증인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4. 우리 모두는 장애 후보들! 

육은 장애가 아니더라도 내적장애인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점검합시다. 주님 구원사역에 역행하는 영적 장애는 아닌지? 

인기 있고 화려했던 하바드 대학교수직을 사임하고 장애인들과 함께 동거하면서 그들의 대소변을 돌봐주고 목욕·음식·옷 등 가장 힘든 궂은 일들을 하면서 영성의 무르익음을 체험했던 헨리 나웬(Henri Neouen)처럼 우리도 우리 주 예수님의 제사적 감정, 제사적 언어, 제사적 손길로 장애인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하는 주님의 손길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저 그늘진 곳에 있는 장애인들의 구주이십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사 되신 예수님께 나아오면(30-31절) 예수님은 각 사람들이 안고 있는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의 발 앞에 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습니다.(31절) 이방인들이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B. 사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32-39) - 7병2어 기적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전파하시는 말씀은 권세가 있었으며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삼일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먹지 못하여 굶주리고 지쳐있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리고 지친 저 많은 사람들을 그대로 보낸다면 길에서 기진 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모든 무리를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들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무리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하고 4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7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마 14:16에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부족하지만 먼저 내어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내어놓으면 주님이 기적을 베푸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늘은 배고픈 군중을 먹이시려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 32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며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제자들은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33절)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 도대체 광야에서 이 많은 사람에게 배부르게 나누어줄 떡을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아예 그런 생각은 마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대답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물으신 것은 예수님은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주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 속에는 "나는 전능자이다. 나는 만물을 창조한 창조자이다. 나는 너희가 기다리고 인류가 찾는 메시야이다"라는 자기계시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며, 그를 믿게 하는 말씀이요, 그를 경배하게 하는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 즉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자기계시인 것입니다. 


2. 무리의 형편을 잘 아시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 말씀 속에는 "나는 저들의 배고픔을 안다. 저들이 집까지 가는 동안에 겪는 허기와 피곤을 안다. 나는 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괴로움을 아시며 그 괴로움을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백성들의 행복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허기진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그들의 피곤이 곧 나의 피곤이요, 그들의 배고픔이 곧 나의 배고픔이다. 나는 저들을 사랑한다. 나는 저들을 결코 주린 채로 돌려보낼 수 없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불타는 사랑의 음성인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40:17절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 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라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115편 12-13절에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의 수고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좁은 길에서 겪고 있는 고뇌를 주님은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3. 예수님께 오는 자는 결코 거저 돌려보내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3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며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을 꼭 먹이시고야 말겠다는 주님의 뜨거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7:37절에서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거저 돌아간 때는 결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문둥이든지, 백부장이든지, 이방의 가나안여인이든지, 소경이든지, 세금 받는 삭개오이든지, 지체 높은 니고데모이든지, 혈루증 앓는 여인이든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든지 그 누구도 예수님께 왔다가 그냥 돌아간 예는 없었습니다. 모두다 주님의 은혜를 입고야 말았습니다. 축복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러한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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