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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어서 오라 하십니다 (딤후 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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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라 하십니다’.com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딤후 4:9-13)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딤후4;21-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가 그 동안 부모님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것을 한 번쯤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부모님의 존재 자체를 귀찮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부모님이 오히려 우리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부모님을 구박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성경이 명령을 하십니다. 성경말씀, 하나님약속 대로 하셔서 범사에 잘될 뿐 아니라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모님이 소중한 까닭은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부모님은 비록 인간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 대신입니다.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준비해 놓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령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순종하고, 공경하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약속을 주는 신은 하나님뿐이며, 그런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모세를 통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5:16) 

그렇습니다! 이것이 옳습니다! 인간이라면 부모님에게 순종과 공경을 드려야하고, 특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 바로 부모 순종과 부모공경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과연 부모님 순종과 공경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사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부모님의 자녀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조건적이며 또한 크고 놀라운 반면에... 자녀들은 부모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많이 인색합니다. 

왜 성경이 어째서 부모님 사랑을 이토록 강조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죄인(罪人)이라서 그렇습니다. 옳은 일이요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다만 구호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 사랑을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협박이나 저주에 가깝게 말씀하셨겠습니까?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20;9)은 아예 협박의 말씀입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부모에게 불효했다고 사형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불효자와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은 사형입니다.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신21;18-21) 말씀을 보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잠 30;17) 말씀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좋은 이론이 아닙니다. 하면 좋은 일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상이 있고, 반드시 벌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머리나 입술로만 사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웃사랑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 하시는데... 하물며 부모님께 말과 혀로만 사랑해서 되겠습니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자기희생이 있을 것 같고, 꽤나 불이익을 당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범사에 잘될 뿐 아니라 땅에서도 장수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이 아닙니다. 이미 출애굽기 20장, 그리고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에 분명히 약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약속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효도에 있어서 우리가 버려야 할 사상이 ‘고르반’사상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고르반’ 사상을 깨뜨리십니다. Corban 고르반이란 어떤 물건을 하나님께 예물로 바쳤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의 일종입니다. ‘이건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당신들이 손대면 안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르반’서약의 원래 취지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은 좋은 것을 나쁘게 만듭니다. 예수님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부모님께 드려야 할 물건을 ‘고르반’해버렸습니다. 

(막7;10-12)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부모님께 안 드려서 좋고, 하나님께 드렸으니 신앙이 있어 보이니 좋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합법적으로 불효를 하고, 사정을 모르는 남이 볼 때는 참 신앙이 좋구나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부모에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에 고르반을 악용했습니다. 이런 위선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선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행동입니다.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막7;13) 혹시 오늘날은 이런 ‘고르반’이 없을까요?  오늘 날은 굳이 ‘고르반’하지도 않고, 대 놓고 불효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진심으로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기를 원합니다.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어버이날, 어버이주일에 당사자들인 어르신들은 어떤 생각에 잠기실까요? 
성경에서 이런 어르신들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부분은 어디일까요? 성경 이곳저곳을 살피다 ‘디모데후서’만큼 어르신들의 마음을 여과 없이 담아내는 성경이 드물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서 가장 마지막 편지, 즉 그의 유언장이라는데 이론(異論)이 없습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 4장은 유언 중의 유언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이미 나이는 많이 들었습니다. 눈이 흐려 직접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대필자를 곁에 두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점점 죽음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지면서 생을 정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여기 ‘전제’라는 단어는 제사를 드릴 때 제물위에 붓는 포도주를 뜻합니다. 이 포도주는 제물위에 가느다랗고 길게 부었습니다. 마치 사우나 실에 비치된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끊임없이 떨어지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생명이 제물에 다 부어지는 포도주처럼, 아래로 거의 다 쏟아진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자기가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코앞에 닥친 죽음 앞에서 그 어떤 두려움, 아쉬움, 후회, 미련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과 면류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그런데 이어지는 디모데후서 4장 9절부터오늘 본문을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오라’는 단어가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자세히 보니 마가를 데리고 오라, 겉옷을 가지고 오라, 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당부하는 음성은 가슴 시리게 합니다. 이 겨울이 꼭 자연의 겨울만을 뜻하고 있을까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요? 
  
바울에게 에베소교회는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저들과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행20:17-38 장면은 감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교회였기에 바울은 자신의 영적 아들이요,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를 자신을 대신하여 에베소에 보내어 교회를 치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오라. 속히 오라. 올 때 겉옷을 가지고 오라. 겨울 전에 어서 오라.’(21)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이 이런 요청을 할 수 있는가?  바울이 있는 로마에서 에베소는 가까운 거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 사역을 내려놓고, 양떼들을 돌보는 일조차도 멈추고 오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이 말입니다.  막무가내로 ‘오라’ 고 요구하는 모습은 나이 많은 노인이 아들 딸에게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고 좀 주책을 떠는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아마 겨울 전에 안 오면 영영 못 볼 수도 있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한 것은 강직하고, 열정적이던 바울도 세월 앞에서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운 것입니다. 따뜻한 겉옷 한 벌이 그렇게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요청합니다. 그 바쁜 디모데를 채근합니다. 이것은 신앙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차원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코앞에두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오라 오라 어서 오라’ 를 6번이나 되풀이하는 노(老)사도 바울을 보면서 우리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아야 합니다. 부모님들의 말, 태도, 요구, 마음을 읽어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의 얼굴이 가물가물합니다. 

한 남자 집사님이 구역예배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좋지 않은 관계가 계속되다가 군에서 아버지의 부고(訃告)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로 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구역 모임에서 고백하는 것을 듣고 그날 밤, 모두가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버렸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순종’이란 단어 대신에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자녀여러분, 부모님이 살아계시든지, 이미 돌아가셨든지, 그 부모님을 용서하기 바랍니다. 지금 무척이나 바쁜데 오게 만들고, 주책없이 잔소리가 많은 부모님. 구시대의 관습에 사로잡혀 있는 부모님. 경제적 부담을 주는 부모님. 치매에 걸려 엉뚱한 소리와 행동을 일삼고 어린아이처럼 되어 버린 부모님. 상처만 안겨주고 나의 꿈을 접게 만들어버린 부모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님. 용서하길 바랍니다. 용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 부모님을 잘 섬기고 있습니까?  홀대(忽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원망을 하십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게 되는 법입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생전에 따뜻하게 모시지 못하면, 돌아가신 다음에 한(恨)이 많은 법입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부모는 쓸쓸한 존재입니다. 병들어 계시면 더욱 자녀를 보고 싶어 합니다.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6)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룻기에 보면 모압 땅으로 이민 간 나오미가 나옵니다. 그곳에 가서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이 때 나오미가 두 자부를 보낼 것을 결심합니다. 큰 며느리는 홀로된 어머니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룻이라는 며느리는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나서습니다. 끝까지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하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 룻은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가문에 들어왔고 이방 여인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드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효도하면 복이옵니다.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효도하면 그 자녀도 복을 받고 행복해 집니다. 
 
마가를 데리고 가듯이 손자 손녀들도 데리고 가서 보여줍시다. 겉옷을 가지고 가듯이 부모님을 따뜻하게 해 드립시다.  책을 가지고 가듯이 부모님이 하실 수 있는 소일거리도 챙겨드립시다.  무엇보다 겨울 전에, 부모님을 더 못 뵙기 전, 아직 날이 춥기 전에 부모님을 찾아뵙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아니라도... 나 자신이 후회하지 않도록 효도하시기를 결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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