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어린 아이들처럼 되라 하십니다 (마 18:1-6)

첨부 1


어린 아이들처럼 되라 하십니다 (마 18:1-6)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행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세례를 베풀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왔습니다. 몰려드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거친 독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그러면서 호되게 나무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런 세례 요한을 무례하다고 생각하거나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례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로마의 앞잡이요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놈들’이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있던 세리들도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강직함의 대명사인 군인들도 세례 요한 앞에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그에게 삶의 길을 묻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헤롯왕이 잘못한 짓을 했을 때 과감하게 비판을 합니다. 헤롯이 자기의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은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옳지 않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은 헤롯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게 되고, 헤로디아의 간계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30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정말 큰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태복음 11:11) 

그렇습니다. 비록 세례 요한은 3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예수님께서도 그의 업적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정말 큰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30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 사람이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고독한 소리’로서의 외로운 사역을 홀로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권력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목베임을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말 큰일을 한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이상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앞에서는 세례 요한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치켜세워주시고서는 바로 이어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 의해서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학습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 -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따진다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만큼 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큰 자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자일 수 있고, 세상에서는 가장 작은 자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큰 자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세상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발단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하고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큰 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고, 큰 자가 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큰 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지만, 그들도 여전히 세상적인 욕망 - 큰 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요구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소서.’(마가복음 10:3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권력을 잡으신다면, 자기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해 달라는 청탁입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었던 제자들조차도 여전히 세상적인 욕망 - 큰 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반영한 물음입니다. 그들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는 오늘 본문의 배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마태복음 17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사람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때 산 아래에서는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고쳐주지 못해서 제자들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긴 했지만, 그 일로 인해서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세 명의 제자는 변화산에 동행했고, 나머지 9명은 산 아래에 남아 있었는데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세 명의 제자들이 아마도 나머지 9명을 업신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로부터 ‘왜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는 질타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되지만, 성전세를 내십니다. 성전세를 내시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갈릴리 바다에 가서 낚시를 해서 가장 먼저 잡힌 고기의 입을 열면 거기에 두 명 분의 성전세에 해당하는 한 세겔짜리 동전이 있을 것이니 가져와서 나와 너를 위해서 성전세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아주 중요한 정보를 하나 제공해 줍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오는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있었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변화산에 가실 때 동행할 수 있는 특권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전세를 예수님과 함께 낼 수 있는 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러자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큰 자인가 하는 문제로 토론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면서 자기들이 더 큰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에 질세라 다른 제자들도 나름대로 자기들이 더 큰 사람들이고 우겨댑니다. 가롯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의 돈궤를 맡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우겨대고, 세리였던 마태는 ‘자기만큼 배운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무식한 놈들이 까불고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에 도착할 때까지 예수님 뒤에서 서로 자기들이 큰 사람이라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결론이 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러다가 가버나움에 도착해서는 ‘그럼 예수님께 물어보자.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지...’ 그렇게 합의하고는 예수님께 물어옵니다. 그냥 묻자니 자기들의 세상적인 욕망이 다 드러날 것 같으니까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 중에 누구를 가장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묻지 못하고, 자기들의 부끄러운 내면을 숨기고 말을 바꾸어 묻습니다. ‘주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도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그렇게 물어오는지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누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되지 않으면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크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돌이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킨다’는 말은 지금 그들의 모습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도, 출세한 세리 마태와 같은 사람도, 용감한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는커녕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돌이키다’는 말은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지금 제자들을 앞에 한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돌이켜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를 닮아야 할 모델로 세운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가르침입니다. 당시의 유대문헌 중에서 어느 곳 하나 어린이를 모델로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가장 낮은 계층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이야 어린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면서 어린아이들을 존중해 주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집안에서 모든 일의 1순위가 아이들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납니다. 아이가 시험을 치루는 시험기간이 되면 온 집안이 비상상태에 돌입합니다. 그만큼 아이들이 귀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정에서야 어린아이들이 소중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린아이를 가장 낮은 계층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이들은 숫자를 셀 때에 제외되었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모델로 세우시고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작은 자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낮고 작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가복음 10:24) 

부자가 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부자는 스스로 큰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 자는 작은 바늘귀를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작은 바늘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바늘귀보다 작아질 때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이 마치 그와 같습니다. 자신을 높고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또 낮추어, 자기를 작게 만들고 더 작게 만들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은 ‘돌이켜 자기를 낮추고 낮추어 작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작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자기를 낮추어 작아진 그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작아지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자기를 더 크게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떱니다.
  
이솝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 속 마을에 아빠개구리와 아기개구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연못가에서 놀던 아기개구리는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커다란 황소를 보고 아빠개구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소리칩니다. “아빠~ 아빠, 아빠보다 훨씬 커다란 황소를 보았어요.” 이 말에 아빠개구리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쭉 내밀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자, 잘 봐. 아빠가 더 크지?” 아기개구리가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합니다. “아니요. 황소가 더 커요.” 그러자 아빠개구리는 더 많은 공기를 들어 마시고는 “그래, 이번엔 내가 더 크지?”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아기개구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아빠개구리는 더 힘껏 숨을 들어 마시며 배에 바람을 가득 채우는 순간 ‘뻥’하고 아빠개구리의 배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단순히 개구리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이것은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을 만나면 자기 몸을 부풀리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최대한 자기 몸을 크게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겁을 먹고 달아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적을 만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자기를 크기를 보이려고 합니다. 특별히 사람의 됨됨이가 부족하거나 실력이 모자란 사람들이 자기를 크게 보이기 위해서 더 안달을 합니다. 큰 차를 타야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큰 집에 살아야 남들 앞에 기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유명메이커의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짜 논문을 써서라도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을 드러내야 실력을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 인간의 허영심이 만들어낸 짝퉁 인간일 뿐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과거를 확대 재생산합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자랑에 빠집니다. 그런 업적이나 선행이 자기를 크게 보이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자신이 드러낸 깃털을 가지고 사람들이 나를 크게 봐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그 앞에서는 대단하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지 모르지만 뒤에 가서는 무시해버립니다. 차라리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때보다도 훨씬 더 못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크게 보이려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우리를 작고 미천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반대로 자신을 낮추고 작게 만들면 사람들은 나를 귀하고 크게 보아줍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높게 보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크게 만드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큰 자로 인정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자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야보고서 4:6)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결코 자신을 크게 보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커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선 사람이 자신을 크게 보이려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모습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 앞에 작아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주일에 어린이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를 크게 보이려고 거짓으로 옷 입지 않습니다. 혹 우리 시대에 그런 아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크게 보여야만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우리가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본성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작은 자일 뿐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모르는데도 아는 척하며 자신을 크게 보이기 위해서 거짓의 옷을 입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많이 가진 것처럼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어른들이 가진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왕따시키니까 아이들이 그것을 배워서 가난한 아이들을 무시합니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니까 없는 아이들도 없는 것을 티내지 않기 위해서 비싼 옷을 입으려 하고,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사려고 합니다. 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과 허영으로 물들이다 보니 세상은 자꾸만 본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순수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동물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적을 만나면 자신을 키워서 적으로 도망가게 만드는 동물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은 우리에게 엄한 경고를 줍니다.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말입니다. 누가 작은 자를 실족하게 만듭니까? 작은 자를 실족하게 만드는 사람은 작은 자가 아닙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신을 크게 보이려 안달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작아지는 사람은 작은 자를 업신여기거나 실족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이 높아지려 하는 사람, 자신을 크게 보이려 하는 사람이 작은 자를 업신여기고 실족하게 만듭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 

작은 자는, 스스로 낮아지는 사람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한나 W. 스미스(Hannah W. Smith, 1832-1911) 여사가 쓴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이란 신앙고전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가 양자를 키우는 어떤 부잣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 양자로 들어온 그 아이는 자신이 양자로 왔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 집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배려와 보호를 아낌없이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양자이기 때문에 양부모가 자신을 언젠가 쫓아낼 거야. 어쩌면 언젠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런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또 ‘양부모가 가난해져서 나를 먹이지 못하면 어쩌지, 내게 용돈을 못 주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양부모가 하는 일이 잘 안 돼서 날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할지도 몰라.’ 그런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양부모님께 맡기고 오늘 자신을 사랑해준 그 사랑을 마음껏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도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는데, 나는 내 장래, 내 삶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어린아이는 부모를 신뢰합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의탁합니다. 부모님께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작은 존재이기에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 뿐입니다. 그게 어린아이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작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그래야만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