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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신앙생활과 부모공경 (마 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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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과 부모공경 (마 8:21-22)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께 할 말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곳으로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마12:4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다는 전갈을 받고도 내다보시기는커녕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는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셨습니다(마12:47-50). 이 사실은 우리를 무척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모와 형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고 긴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열두 제자 가운데 들지 못했지만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따르던 보다 큰 무리 중에 먼저 자기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러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에게 대답하시기를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8:22)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나라의 일만 하기를 원하시며 가족을 돌보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생활과 부모공경은 병행하며 조화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불편하고 불안한 의문을 갖게도 합니다. 반발심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나 몰라라 하라 하실 수 있는가 하는 반문이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최고의 선행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후기 유대교에 와서는 모든 종교적 의무에 우선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아직 장사지내지 못한 시신 앞에서는 신6:4-9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신6:4-9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이스라엘에 가면 사람들이 성냥갑이나 담배갑 크기의 상자에 끈을 매어서 손목에 부착시키거나 이마에 고정시키고 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바로 이 신6:4-9의 말씀이 기록된 종이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틈나는 대로 외우며 다닙니다. 그것을 “셰마”라고 부릅니다. “셰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한 데서 “들으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런데 랍비들은 가르치기를 아직 장사지내지 않은 시신이 있다면 그 앞에서는 “셰마”를 외우지 않아도 되고 그 말씀이 든 상자를 손목에 차거나 미간에 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물며 자기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은 유대교 사회에서는 엄격한 의무였습니다. 레21:1-3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지는 것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일이지만 자기 가족의 시신을 만지는 것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그 누구보다도 성결해야 할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부모나 가족의 경우에 있어서는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을 돌보는 것이 당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전한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보다 깊게 재해석해서 가르치시기는 했지만 율법을 한 점이라도 폐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성하려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던 부모의 장례예식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무리 성경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람에게도 문자 그대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하셨지만 죽은 자들은 장사하는 일이고 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그 말씀이 죽은 문장이 되지 않으려면, 즉 아무 의미 없는 말씀이 되지 않으려면 이 문장은 마땅히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제자가 예수님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청할 당시 그의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는 말은 꼭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먼저 장사부터 지내고 오겠습니다”라는 뜻으로만 아니라 “아버지가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 같으니 그때까지는 우선 아버지를 돌보겠습니다”라는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제자의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곧 죽을 것처럼 매우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아들은 아버지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배타고 주님 따라 호수 건너편 지방으로 갔다가 빨리 돌아오지 못하는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례도 못 치를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 실제로 이미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벌써 죽었다면 그렇게 아버지 장례 걱정하는 아들이 태연히 주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의 아버지가 수일 내 곧 죽지도 않을 것을 다 알고 계셨기에 아픈 아버지 돌보는 일은 다른 식구나 친지들도 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염려 말고 나를 따르라. 네 아버지가 죽지 않고 오히려 사는 참된 길을 내가 네게 확실히 보여주겠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생의 길이 주님 자신에게 있음을 그 제자에게 보여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결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부모가 죽어도 내팽개치고 장례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고 존중하셨습니다. 이 제5계명은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중 앞의 “죽은 자들”은 분명 육신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에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나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은 장례를 치르는 일이건 무슨 일이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시체를 장사하는 일이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신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 장사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합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은 사람 장사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 같은 일상사를 걱정하는 일은 하나님나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나 할 일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은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일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접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영생을 얻게 하시는 주님을 알게 해서 살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제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막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가려하고 계셨습니다. 배를 타시면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에 덮이게 될 터인데 먼저 거기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순조시키시는 놀라운 권능을 보이실 계획이셨습니다. 그리고는 건너편 가다라 지방으로 가셔서 무덤 사이에서 사는 귀신들린 사나운 자들에게서 귀신을 제압하시고 내쫓아주실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연과 영들의 세계까지도 주장하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심으로써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시는 능력이 주님께 있음을 확신시키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 말고 배를 타라고 권하시며 하신 말씀이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네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는다. 

너는 아버지가 죽을 걱정 하지 말고 그를 살릴 궁리를 해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내가 분명히 너에게 보여주겠다. 그 영생의 길을 확실히 깨닫고 그 길을 네 아버지에게 전해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네 아버지를 위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뜻으로 하신 것이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패륜을 권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내려다보시며 먼저 어머니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하시고 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7) 하시며 당신 대신 어머니를 돌보아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극심한 육신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로 탈진할 대로 탈진하셨을 상태에서도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아들의 도리를 잊지 않으신 주님을 너무나 아름답게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 후에“내가 목마르다.” 하시고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입에 대자 그것을 받으시고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요19:28-30). 어머니에 대한 염려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겨놓으시고야 “다 이루었다.” 하신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부모공경과 가족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과 그 가르침의 깊이를 깨닫게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장사를 지내고 와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부모공경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장사하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님이 영원히 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부모님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시게 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를 기쁘시게 하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는 부모님들이시라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믿고 구원받아 영원히 복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시게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일일 것이며 그것이 효도 중의 효도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부모공경이 상충하지 않고 아름답게 조화되도록 늘 기도하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자녀들까지 온 식구가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행복한 가정 되기를 힘쓰는 이번 <가정의 달> 5월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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