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세상의 기준 – 어린이 (마 19:13-15)

첨부 1


세상의 기준 – 어린이 (마 19:13-15)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옛날에는 어린이를 꽃이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피어오르는 꽃과 같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주일을 꽃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린이는 참 중요한 존재입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시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직 미성숙하고 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무시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너무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주인이고 미래를 위한 세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9장입니다. 19장은 천국시민의 조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서, 이혼에 대해서, 독신자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부자와 천국에 대해서, 구원과 최후 상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13절부터 보면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신 직후에 어린아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하면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고귀한 열매인 어린 아이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혼하면 그 고귀한 열매인 어린 아이에게 주어질 무언의 영향을 메시지로 주시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시는지 어린이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 옴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당시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랍비에게 가서 안수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관례(창 48:14, 민 27:18, 행 6:5-6, 딤전 4:14)였습니다. 아이들은 복을 선포하고 안수해 주어야 할 대상들입니다. 더구나 그곳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어머니들이 줄지어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아이들이 오니까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시끄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아이들은 조용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시끄러운 것은 누구나 다 용납합니다. 할아버지 수염을 대놓고 쥐어뜯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이 아이들입니다. 수염을 붙잡고 늘어져도 할아버지는 웃으며 용납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와서 시끄러우니까 제자들이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아이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고 자세히 보면 그 부모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한 것도 이해는 갑니다. 아이들이 자꾸 몰려오면 갈 길이 지체되고 지금 병자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래서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선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 눈에는 어른이 먼저였고 아이들은 그 다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집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만 놀고 있습니다. 그때 “얘들아 집에 사람 없니?” 하고 묻습니다. 무심코 하는 말 속에 사람들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인식도가 그대로 묻어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것에만 관심이 있고 작은 것은 무시합니다. 그런데 정말 소중한 것은 작은 것들입니다. 모든 기계부품 중에 큰 것인 하드웨어는 값이 쌉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 즉 기계작동을 가능케 하는 운영체계인 이런 작은 프로그램은 핵심 부품이라 값이 비싸고 부가가치가 높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까지 이 하드웨어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작은 것들에 대한 소홀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작은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건 사고의 원인을 보면 모두 작은 것의 부주의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도 수출에만 관심을 쓰다 보니까 우리들의 가정 그리고 아이들이 파괴되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 와서 관심을 가지려고 보니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무시하였지만 주님은 아이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

꾸짖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가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천국시민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이 어린아이들만의 세계란 말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맑고 깨끗하고 정결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본 그대로를 말합니다. 그것이 천국 시민의 자격입니다.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뛰어 들어가면서 “하나님 오신다!”고 소리쳤습니다. 초등학교에 반장선거가 있었습니다. 두 아이가 출마를 해서 투표를 했는데 동표가 나왔습니다. 

출마한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사회를 보고 있었기에 누군가 당연히 1표 차이로 당선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투표권을 가진 나머지 한 아이는 자기가 자기를 찍는 것이 멋쩍으니까 상대편 아이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옛날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이들은 이런 아이가 없고 어른 뺨칩니다. 이 세상이 그만큼 아이들까지 타락했다는 징조입니다. 

요즘 학교 폭력 사례를 보면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였는가! 기가 막힙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두 어른들 책임입니다. 지난 선거 때 보니까 어떻게 하든지 표만 얻을 수 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습니다. 약속도 철학도 도리도 원칙도 없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쌍욕을 하는 이들임에도 국회의원 후보에 내 보냈습니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들이 인기가 있다고 그들을 앞세워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 어느 대선후보라는 사람은 그들을 앞세워 선거 운동까지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당선되었더라면 이 나라는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건듯하면 욕지거리가 경쟁적으로 튀어나오는 국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그들을 앞세웠던 사람들은 그 후에도 아무 개념 없이 여전히 뭘 하겠다고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를 본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와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순전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순결과 거룩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 시민의 자격은 어린 아이들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만큼 맑고 순전하기 때문입니다. 

안수하심

예수께서 아이들을 맞이하여 각각 안수해 주셨다(15)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오면 안수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찾아온 아이들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이 구절이 후에 유아세례를 주게 되는 기원이 됩니다. 유아세례는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들 가운데 아레네우스, 오리겐, 털투리안 등이 유아세례를 처음 말했습니다. 특히 오리겐은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롬 5:9절을 근거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아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유아세례를 강조한 이유는 이이들의 신앙은 어른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아이들이 가진 그 순결을 오래 유지하게 해 주고 교회는 아이들이 성장하여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거룩하게 훈련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어린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 6:4-9절은 쉐마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교육의 기본으로 삼는 말씀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교육의 기본은 이 쉐마에서 시작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정규교육이 없어 집에서 부모가 가르쳤습니다. 그때 가르친 기본이 바로 이 쉐마입니다. 쉐마는 “들으라”라는 동사의 명령형으로 교육을 시작할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처음 하는 말에서 유래된 가장 기본이 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태어나 말을 시작할 때부터 교육에 힘씁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묻거든 너는 대답하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 하나님 권능으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인도해 내시고 너희는 주어진 규례를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오늘 우리에게 복을 누리게 하셨다” 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신 6:21-24). 이 말씀의 중심은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내용입니다. 

이 짤막한 문구 안에 모든 원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면 모든 구실을 다 하는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육 바탕은 이이들을 인격체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이들에게 안수하신 것도 아이들을 완전한 인격체로 보았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 세상의 기준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특별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인정이 있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입니다. 선진국의 기준은 장애인이나 아이들을 존중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매사 장애인과 아이들이 먼저입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 다른 조건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하나의 기준입니다. 또 하나는 “아이들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아이들을 특별히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이들만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포악한 사람, 인성이 메마른 사람, 독재자들은 가슴에는 한결같이 냉혈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포악하고 난폭한 것입니다. 특히 독재자들을 보십시오.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할 때 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무서운 나라입니다. 북한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를 안 합니다. 오늘 북한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도 개념이 없습니다. 저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이 크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참 분노가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북한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북한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햇빛 정책이라는 것을 했는데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햇빛정책은 거센 바람보다는 햇빛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데 효과적이었다는 이솝 우화에서 따온 정책이었습니다.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햇빛을 비추듯이 무조건 북한을 감싸 안아야 한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남한은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남조선 혁명론은 북한의 최고의 가치이고 북한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북한은 햇빛을 비춘다고 그 가치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순진하게 햇빛을 비춘다고 북한에 막대한 돈을 주었습니다. 햇빛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한에 햇빛을 비추면 옷을 벗으리라고 기대를 했는데 북한은 옷을 벗기는커녕 그 기간에 옷을 더 끼어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무기를 만들고 마침내 핵무기까지 만들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몰랐습니다. 북한은 햇빛정책으로 결코 안 되는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의 지적대로 북한은 독침을 가진 전갈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전갈이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마침 개구리도 건너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갈이 개구리에게 나를 업어 건너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강 중간에 갔을 때 네가 나를 독침으로 쏘면 어떻게 되는데 너를 엎고 가겠는가 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합니다. 그러자 전갈이 “그러면 너와 내가 함께 죽는데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합니다. 개구리는 그 말을 믿고 전갈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넙니다. 설마 했습니다. 강 중간에서 전갈이 독침을 쏘면 둘 다 물에 빠져 죽습니다. 

개구리는 전갈이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개구리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강 중간에 이르렀을 때 전갈이 독침으로 개구리를 쏩니다. 개구리가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면 너도 죽는데 왜 나를 찌르는가?” 전갈이 대답하기를 “이것이 나의 본성이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전갈이 때와 장소를 가려서 찌르면 전갈이 아닙니다. 우리는 북한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장밋빛 기대를 가지면 안 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쏘면 우리도 너도 함께 죽는데 설마 핵폭탄을 쏘겠는가?” “통일이 되어 남북한이 하나 되면 그 핵무기는 우리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거야 말로 철없는 장밋빛 순진한 생각입니다. 제발 우리는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헤롯이 두 살 미만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설마 인간이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몇 명은 죽였겠지, 매사를 우리 기준으로 생각하면 속기 쉽습니다. 실제로 헤롯은 반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8km입니다. 그 반경 안에 있는 2살 이하 아이들 14,000명을 죽였습니다. 그때 헤롯은 자기 아들까지 죽였다고 했습니다. “설마, 자기 아들까지 죽여“하고 우리는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기준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따뜻함이 흐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냉혈이 흐릅니다. 그 사람은 아이들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기준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을 소중히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보는 그대로, 가르치는 그대로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아이가 말하기 시작하면 쉐마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니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기본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놓으면 나머지 모든 일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이 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개념적 입니다.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말라” 이것은 기본도 아닙니다. 

그러려면 어른이 곧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보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이 본다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자기들은 쌍욕쟁이를 국회의원 후보에 내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교사에게 쌍욕을 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말라고 합니다. 앞뒤가 맞는 말입니까. 아버지가 술 중독에 빠져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자라던 아이가 맹세를 했습니다. “나는 크면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을래.”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이가 성장하면 그 아버지 모습 그대로를 흉내 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본 그대로 마음판에 새겨진 DNA가 피를 통해 내 안에 그대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본을 말씀하시고 기초를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내게 옴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아이들은 아직 세상에 물들기 이전인 백지와 같은 때입니다. 어른들은 그 순결을 오래 간직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잃어버린 이 순전함과 거룩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참 교육이고 오늘 주일에 우리들이 되새겨 보아야 할 메시지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