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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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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롬 8:31-39)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장점을 엉뚱한 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전도할 때 하는 말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존적인 데에서 신앙의 필요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인생의 고난 · 괴로움 · 가난 · 질병 · 고독 · 실패 이런 데에서 신앙의 필요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인기 있는 찬양 가사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시험 걱정 근심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 오라’ 등 우리 자신도 실존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이웃에게 전도할 때도 같은 이유를 들어서 권유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떤 이유로 교회에 나오게 됐습니까?’ 물어보면 십중팔구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뭔가 의지할 데가 필요했다.’ 이런 식의 대답을 듣습니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실존적인 문제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나병환자는 자기를 깨끗하게 해 달라고 찾아왔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찾아왔고, 바디매오는 자기 눈을 뜨게 해달라고 찾아왔고, 혈루병 걸렸던 여인은 자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거부하지 않고 다 환영하시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간혹 예수님은 이들이 부탁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친구들이 매어 와서 천장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죄 사함을 얻으러 온 게 아니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 것인데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셨어요.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 때 예수님이 돌아보시고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구원을 위해서 찾아 온 게 아니고 병 나음을 위해서 찾아온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 구원에 대해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것을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대속물-ransom, 이 말은 몸값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납치를 당했을 때 풀어주는 대가로 지불하는 돈, 그것을 몸값이라고 하는데 인류가 죄에 붙들려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풀어주는 대가로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알고 배우고 믿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 이외의 혜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람들이 언제 ‘아멘!’ 하는지 아십니까.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해야 사람들이 ‘아멘!’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이 모든 것’이 아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인데 여전히 사람들은 그 본래의 취지보다는 보너스로 더해주시는 ‘더해주시리라’ 여기에 사람들이 ‘아멘!’하고 그것을 좋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에요. 

또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에서 ‘모든 것’을 사람들이 더 좋아합니다. ‘그 아들’보다도 ‘모든 것’을 더 좋아합니다. 마치 월가의 금융인들이 연봉보다 보너스를 더 밝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보다는 보너스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필요하지만 보너스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죄 사함의 혜택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영화 대부3편을 보면 바티칸 은행이 거대한 금융스캔들에 휘말려서 부실대출을 해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은행을 담당하는 대주교가 주인공에게 뭐라고 말하느냐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아니고 빚을 탕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말을 듣고 주인공이 말하기를 ‘아하! 죄를 사하는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 Do not underestimate the power to forgive.’ 이렇게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죄 사함의 혜택은 이후에 천국에 갈 때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이라는 것은 이후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사용하는 티켓인 것뿐만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죄 사함의 확신, 죄 사함의 혜택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정죄감을 느끼고 죄의식을 느끼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창피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 이 말씀이 괜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죄감 · 송사 · 대적함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삶의 현실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예수 믿기 이전에는 여기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지만 내가 믿는 것과 나의 현실의 차이점이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속에 죄의식을 품습니다. 이것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누가 진짜 위선자냐? 믿는 것과 사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 사람이 위선자가 아니에요. 만약 그걸 위선자라고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위선자요, 세상 모든 크리스천이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진짜 위선자는 자신의 삶에 이러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속에 죄책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위선자인 것입니다. 거룩한 척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의 방식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애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목적도 내 믿음과 내 삶의 방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거리가 좁은 사람도 있고 먼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신앙의 담대함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리를 좁혔다고 해서 신앙에 담대함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행위와 공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여 담대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의로움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죄에도 똑같이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기 이전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했다가 믿음 후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내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능히’라는 말은 수식어가 아닙니다. 이 말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수식어가 아니고 이 말씀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송사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들의 송사에 힘이 없다, 위력이 없다, 유효하지 않다, 구속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Who can accuse 영어로 하면 can이라는 말을 건너뛸 수 있지만 ‘능히 송사하리요’라고 번역하는 데에서 사도바울이 자격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 능력 · 위력 · 효력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을 캐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가 감히 송사하리요’라고 말하지 않고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감히 송사하리요’라는 말은 누가 엄두를 내겠느냐, 누가 자격이 있겠느냐 라는 뜻이지만 ‘능히 송사하리요’라는 말은 사람이 송사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송사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송사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송사하고 우리 서로가 서로를 송사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은 송사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안 믿는 사람과 달라야 된다, 더 거룩해야 된다, 경건해야 된다, 착해야 된다, 의로워야 된다, 이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주저하느냐? 이러한 의무감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 의무감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일단 신앙의 세상에 들어온 다음에는 이 의무감이 평생 짐처럼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사람이 주변에 있든 없든,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이 의무감이 무거운 짐처럼 우리 어깨에 얹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남들과 달라야 되고, 남들보다 선해야 되고, 더 착해야 되고, 싸우면 안 되고, 화내면 안 되고, 음란해서도 안 되고, 욕심을 내서도 안 되고, 예수님을 닮아야 되고, 거룩해야 되고, 경건해야 되고, 기도해야 되고, 찬송해야 되고, 전도해야 되고, 헌금해야 되고, 이런 의무사항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공부해야만 아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당연히 신앙에는 이러한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나를 송사하지 않더라도 내 자신이 나를 송사합니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너 교회 다닌다더니 꼴좋다. 어제는 교회에서 찬송가 부르더니 오늘은 가요 부르냐!’ 이런 식으로 송사 · 정죄 · 죄의식 · 민망함 · 부끄러움 · 수치스러움 이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익숙한 것이 업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것이 정당한 것이냐, 과연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냐, 과연 이것이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오히려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입니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휘트니 휴스턴이 약물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그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도 모두가 압니다. 그는 가수가 되기 전에 먼저 교회에서 찬양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뉴스를 접할 때 우리가 마음속으로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라면 크리스천답게 살아야지 약물에 중독돼서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 밖에는 한 때 교회를 다니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때는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학생부 회장도 했고, 한때는 수련회에 가서 방언도 받아본 적이 있고, 한때는 신학교에 갈 생각도 한 적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그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정죄하고 부끄러워하고 교회와 멀어지고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 앞에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방황하고 그러면서 마음속에 많은 번민을 갖고 삽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이와 같은 말씀을 기록한 것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송사하는 것은 자유에요.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구속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효력이 없습니다. 그들의 송사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들의 송사가 우리의 구원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송사가 우리의 구원을 지워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의 송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아주 귀중한 말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합니다. 내가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할 때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넘어지고 실패하고 부족하고 결함이 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구선수가 골을 넣고 경기를 잘할 때만 하나님을 감사하는 게 아니고 골이 들어가지 않을 때도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열매가 좋을 때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연약하고 허물이 많고 실패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여전히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때에도 내게 족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마귀가 우리의 불신을 이용해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거봐라, 네가 병든 걸 보니까 하나님이 죄 때문에 너를 치신 거다. 거봐라, 네가 실패한 것은 네가 교회를 빠지니까 하나님이 너를 치신 거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와 같은 송사와 정죄를 들을 때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맞아! 맞아! 맞아! 내가 죄를 지었더니 하나님이 나를 때렸구나!’ 마치 병이 안 든 모든 사람은 의로워서 그런 것처럼. 일이 잘 풀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의로워서 그런 것입니까. 그럼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결핵에 결려 죽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는 우리의 섣부른 생각을 하나님께 전가해서 하나님이 그럴 것이라고 단정 지으면 안 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가르치다가는 그리스도인들 모두 자기 멋대로 살게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주님을 멀리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주님을 가까이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고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실감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좋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고 말하는데 정말로 하나님이 좋을 때를 느낄 때가 언제냐. 내가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에 하나님이 정말로 좋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섬기기도 하고 헌신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좋다는 것을 알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고 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공로로 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게으르게 만들고 멀어지게 만드는 게 아니고 더 하나님을 감사하게 하고 더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Amazing Grace - 놀라운 은혜. 놀라운 은혜는 옛날에만 놀라웠던 게 아닙니다. 지금도 놀랍고 앞으로도 놀랍고 항상 놀랍습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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