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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 그 불편한 진실 (막 3:1-35, 막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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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그 불편한 진실 
(막 3:31-35, 막 6: 3-6)


가정이란 단어를 들을 때 어떤 생각과 느낌이 떠오릅니까? 미디어가 그리는 가정, 결혼은 참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광고에서 그려지는 가정은 화목하고, 따뜻하고, 행복한데, 뉴스에서 그려지는 가정은 갈등하고, 냉랭하고, 불행한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 가정에 대한 진실일까요? 행복을 꿈꾸며 시작된 결혼이 상처와 아픔이 되고, 가정이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 상처의 뿌리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가정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정을 꿈꾸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가정은 어떨까요? 
  
성경도 가정에 대한 두 가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에덴동산은 유토피아적인 가정 모델입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delight)이라는 말입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남녀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창1:27). 하나님은 남자에게서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일종의 더 뛰어난(?) 인간 모델을 만드셨지요. 그리고 두 사람이 행복하게 온전한 관계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악과 사건 이후 에덴 동쪽의 가정은 참 불행합니다. 성경에서 에덴 가정의 모습은 겨우 창세기 2장으로 종결됩니다. 창세기 3장부터 가정은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사탄이 두 사람의 관계 안에 들어오고, 아담과 이브는 서로를 비난합니다. 관계의 어려움은 내가 아니라 “네가” 잘못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이후 가정에는 온갖 미움, 질투, 시기, 거짓, 폭력, 살인, 근친상간과 같은 근본적인 죄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창세기는 이런 가정의 모습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신문 기사거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창세기에는 많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파괴된 가정의 모습을 믿고 싶지 않지만, 이것이 가정의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행복한 가정의 신화를 그리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창세기 2장으로 끝납니다. 성경은 가정에 대해서 대단히 솔직합니다. 성경은 가정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가정의 모습

우리는 에덴과 같은 가정을 이상화하지만 현실과의 거리를 느낍니다. 어쩌면 가정이 이상화되면 될수록 현실에서의 경험은 더 큰 상처가 됩니다. 
  
마치 양극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조적 상태에 있다가 우울 상태로 떨어지면 그 아픔이 더욱 깊은 것처럼, 가정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분들은 가정을 더욱 이상화하고 그 이상에 현실이 미치지 못할 때 헤어나지 못할 고통의 무게를 지게 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가정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가정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가정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어린 시절까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유월절에 성전을 방문한 이야기 이후에는 요셉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습니다. 우리는 요셉 일찍 죽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장남으로서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10대와 20대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없습니다. 그는 30세를 기점으로 공생애, 즉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몇 명의 여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족으로부터 멀어진 것 같습니다. 마리아와 형제들은 예수님을 찾아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집 안에 들어갈 수 없자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릅니다. 가족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3장 2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이 귀신을 내좇고, 병든 사람을 고치고,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하자 보인 친척들의 반응입니다. 

6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막6:4-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가족들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가족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상당히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이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예수님의 사역에 가족도 동의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친척과 고향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더욱 배척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온 서기관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의 논점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사로잡혀 있고, 귀신의 힘을 입어서 귀신을 좇아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는지”(3:23)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3:29)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은 가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도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혈과 육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절대적 구조가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가정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정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3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형제와 자매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앞 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3:33-34)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족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에게 가정이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야 선한 것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보는 것은 가족이기주의의 팽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을 세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녀가 우상이 되었습니다. 내 자녀와 내 형제가 중요하지만, 옆에 있는 이웃의 자녀와 형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존재 방식이지만, 가정은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 심지어 부모와 자식도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의 방식이 적용되는 관계방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정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 안에서 가정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정이 아닌, 더 궁극적인 일, 즉 복음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참 좋은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는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로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그리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시면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어머니를 보면서 안타까웠지만, 인류의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한 여인의 아들로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가정을 사랑하시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없습니다. 그에게 가정이 소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가정을 포기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사역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를 전파하는 사역이었습니다”(눅4:18-19) 
  
사도 바울도 자신의 가정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 사역을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택이었으며, 우리는 바울의 사역 덕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처럼 복음을 위해서 독신으로 사는 것이 높은 차원의 소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정을 꾸린다면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고린도교회의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골라처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결혼과 가정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선택은 결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이나 가정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드러나는 공간이며, 하나님은 가정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결혼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지만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계속해서 교회 오빠하면 어떻습니까?)

가정의 회복-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결혼과 가정에 대한 세상의 신화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과 거리가 있습니다. 결혼은 로맨스가 아니라 언약입니다. 즉, 감정이 아니라 헌신이라는 말입니다. 가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은혜와 구원의 통로입니다. 세상은 결혼과 가정을 왜곡합니다. 

현대사회는 결혼과 가정을 이상화, 상업화, 절대화하고 있지만, 정작 결혼과 가정은 상당히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가정 신화에는 “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즉 내가 하나님이 아닌 “나” 중심적인(self-centered) 사람임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후회해도 하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결혼한 사람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행복하다는 통계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결혼이나 가정을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혼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결혼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수단도 아닙니다. 결혼 자체가 인간의 허무함을 채우지는 않습니다. 가정 자체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불안함을 해소하지는 않습니다. 
  
결혼과 가정이 필요한 것은 부족한 인생이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평생 사랑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헬라어에는 세 가지의 사랑의 종류가 나옵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가 그것입니다. 남녀의 사랑은 에로스(로맨틱)적인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강력한 사랑입니다. 서로에게 애착을 느끼고, 심지어는 집착하고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물론 결혼에서 로맨스는 아주 중요합니다만 로맨스가 다가 아닙니다. 
  
결혼에는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필리아가 있습니다. 공통분모를 가지고 삶을 나누는 우정 말입니다. 비슷한 삶의 목적, 관심,취미를 나누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부부는 가장 가까운 친구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에는 로맨틱한 사랑이 식어지고, 가능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정조차도 관계를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게 장애가 생기거나, 치매와 같은 인지 능력을 잃어버릴 경우에 에로스와 필리아 사랑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관계를 지켜주는 더 큰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가페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결혼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서로를 지켜주는 사랑입니다. 
  
결혼과 가정에는 아가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런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 아가페이십니다(요일4:16).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가운데 살아야만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고, 결혼과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의 장소로, 그 사랑의 통로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이 없는 사람들에게 형제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되어 주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라는 물음은 마리아와 자신의 형제와 자매들이 어머니와 동생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는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이며 아들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관계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을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 안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아픈 것도 힘든데 죄인 취급 받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가족이 되어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어떤 것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관계가 단절되어 아픈 사람들에게 자신이 형제이며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 1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14:9) 예수님을 형님으로 모시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든든한 아들 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처럼 그분 곁에 머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5-16)

청년들에게
  
여러분은 결혼과 가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얼마 전에 기사 중에 ABCD이론이 나왔습니다.(남자 A가 여자 B, 남자 B가 C와, 남자 C가 여자 D와 결혼하기 때문에 여자 A와 남자 D가 결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었습니다.) 이 분석은 참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일정 부분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혼은 생각만큼 순수하지 않습니다. 결혼에는 아주 복잡한 역학관계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현대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정략결혼은 바로 이러한 결혼방식입니다. 

저는 오늘 결혼의 허상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이자 최고의 관계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혼이 얼마만큼 파괴되었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적 관점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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