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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하려면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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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하려면 (창 2:18-25) 

 
이 시대에는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고 좋은 집에다 고급 가재도구를 들여놓는 데는 관심을 가지고 비용을 아끼지 않지만, 정작 그 집 안에서 영위되어야 할 가정에 관해서는 너무나 관심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가정의 성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가정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가정의 본 모습을 지켜나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오늘은 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가정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맨 나중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은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지내면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지어 주면 그것이 곧 짐승이나 새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왠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하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셔서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 때 아담이 하와를 보고서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부부로 맺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가정이 하나님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24절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의 법도에 대하여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맺어 주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는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가정의 신성함을 말해 줍니다. 가정은 신성불가침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또는 부모나 형제든, 혹은 타인이든 간에 정당하게 맺어진 부부의 관계를 파괴할 권한이 없습니다. 혼인 관계를 인위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5,6)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배필로 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혼자서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를 일컬어 “돕는 배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혼자 살도록 되어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나 여자 혼자서는 자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산출하는 데는 반드시 부부가 연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자녀를 양육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아버지로서, 아내는 어머니로서 역할을 감당할 때 자녀를 균형 잡힌 인격자로 양육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할 것은, 남편과 아내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협력하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남편이 신앙생활에 나태하면 아내가 권면하고, 아내가 나태하면 남편이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배우자가 아직 믿지 않는다면 전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가정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부부로 짝지어 주신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알고 부부가 피차 돕는 배필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우리의 가정은 견고하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족 사이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 혹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가정이 소중한 것은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의 친밀한 인간관계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단지 혈연관계 그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아담의 가정은 맏아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이는 형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친부모 형제 사이인데도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혈연관계가 행복의 조건이 되려면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만약에 가족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그 가정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은 가족 사이에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행복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집 문을 나서면 잘난 사람이 대접을 받지만, 가정에서는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이 더 대접을 받습니다. 세상 이치와는 정 반대의 현상이 가정에서는 스스럼없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정에 다툼이 생겨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 부족한 것이 원인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이르기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신 대로, 가족이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한 가정은 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전에 신문에서, 아내가 혼수를 적게 해 왔다고 구박하던 사람이 경찰에 입건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혼수를 많이 해 오든 적게 해 오든 그것은 경제 사정에 따라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결혼은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지 혼수나 지참금의 많고 적음이나 상대방의 사회적인 신분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위 정략결혼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은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해관계 때문에 결혼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이 서로 사랑할 때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였고, 잠언 21장 9절에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가정에서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도 해당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가족 간에 약점을 비난하기보다 말없이 그 약점을 보충해 주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이르기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 없는 동정이나 용서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근거한 동정이나 용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하나 되게 합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중국에 대 가족을 거느린 집이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화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 집을 방문해서 그 비결을 물어 보았더니 주인이 손님을 데리고 광으로 가서 큰항아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니 참을 인(忍) 자를 쓴 종이쪽지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 가정의 식구들은 화가 나거나 언성을 높일 일이 생기면 조용히 광으로 가서 참을 인(忍) 자를 종이에 써서 항아리 속에 넣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많은 식구가 함께 살면서도 다툼이 없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 서로 사랑함으로 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현대는 대부분의 가정이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어 있는 핵가족의 형태이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이 드뭅니다. 이는 오늘날 산업화가 가져다준 사회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날이 갈수록 부모를 모시고 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바쁜 일상에 쫓기며 살다 보면 부모님을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쁜 것을 부모 공경을 등한히 하는 데 대한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흔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인즉, 부모 치고 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려서는 부모 없이는 못살 것처럼 알지만, 정성해서 독립된 가정을 이루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공경이란 말속에는 자발적인 것과 더불어 의무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 공경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거든 의무적으로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다섯 번째 계명이 부모 공경의 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이르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6장 1절로 3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십계명에 도적질하지 말라 그러면 복을 주리라, 혹은 살인하지 말라 그러면 이 땅에서 잘되는 복을 주리라고 한 말씀이 없습니다. 도적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 공경은 예외적으로 풍성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부모 공경의 계명을 그만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육신의 부모는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먼저 자녀들에게 부모 공경의 본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까마귀가 자란 후에는 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공양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젊어서는 자식들 양육하느라 뼈가 닳도록 수고하였지만 늙어서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며느리 눈치 때문에 집에도 머물러 있지 못하고 공원이나 거리를 배회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고도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변명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이 같은 모습을 어린 자녀들이 보고 배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부모님의 의식주에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해 드려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부모님께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유교는 부모 공경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내세웁니다. 유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를 하나님의 위치에 앉힙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한 효는 부모님 살아생전에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주 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데 힘쓰심으로 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회에서 성공했더라도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 농사는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녀들이 기대에 어긋나게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부모들이 올바로 자녀를 양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애착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 대한 애착으로 치자면 한국인들처럼 열성적인 사람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 지식이나 예능을 전수하기 위한 교육에 그치고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흉내를 내느라고 소신 있게 자녀를 양육하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학교나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쉬는 날이 되면 유원지에 데리고 가서 놀이 기구를 태워 주는 것으로 부모 노릇을 다 한 줄로 압니다. 또는 원하는 물건을 사다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 한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더욱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도록 하고, 부모가 몸소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쾌락보다 더 귀한 것이 신앙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자녀 교육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세상 지식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유익을 주는 데 그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금생과 내생에 무한한 유익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 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재물은 오늘 있다가도 내일 없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남겨 줄지라도 그것이 항상 자녀의 수중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재물을 많이 남겨 주면 그 재물을 의지한 나머지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살 생각을 하지 않게 되므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하겠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모세에게 물려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겨우 석 달 동안 갓난아이의 목숨을 보호해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국은 갈대상자에 모세를 넣어서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해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게 구출되어 그녀의 양아들이 되었고, 친어머니를 유모로 삼아 양육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어머니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장성함에 따라서 그 마음에 심긴 신앙이 싹이 나고 결실을 맺었습니다. 드디어 모세는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는 위대한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또한 디모데를 보십시오. 그는 헬라인 부친과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았고, 장성하여 사도 바울의 충성스런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디모데가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신앙을 상속받았음을 말해 줍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자녀들이 공부를 게을리하면 야단치지만, 공부 때문에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은 묵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 공부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일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시편 37편 25절에 보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교육이라곤 간이 학교에서 겨우 석 달 정도 읽기와 셈하기를 배운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지만 어머니가 물려준 성경책을 늘 가까이하여 읽었습니다. 그의 연설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성경에 해박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흑인 노예를 대량으로 부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 일을 시정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에는 훌륭한 가문에 유수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출신인 링컨을 통해서 노예 해방의 위업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모자 왕 백성학 씨는 1․4 후퇴 때 피난 가는 교인들의 심부름을 하고 그 결과를 전해 주려고 부두에 나갔다가 영영 고향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부두에 서서 손을 흔드는 그에게 어느 교회 청년이 “성학아, 너 참 수고가 많았다.” 하면서 사탕 사 먹으라고 하면서 돈을 건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으려고 윗몸을 기울이는 순간, 통통선이 소리를 내면서 출발했고 부두에 매여 있던 발판이 빠졌습니다. 그는 배에 뛰어 오르지 않으면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급히 피난선에 올라섰습니다.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남한에 와서 고아가 되어서 떠돌아 다니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숱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해서 타락하지 않고 기어코 훌륭한 기업가로 성공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를 붙들어준 것은 그가 믿어 온 기독교 신앙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고향에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이기고 성실하게 성장하였습니다. 남의 집 직공으로 들어가서 모자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나중에 자립해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었더라면 벌써 타락하고 말았을 것이지만, 신앙이 그를 지켜 주고 위대한 성공으로 인도해 주었던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식을 귀여워할 줄만 알았지, 제대로 양육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이 사랑스러울수록 훈계하고 매를 들어야 합니다. 잠언 23장 13절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고, 잠언 22장 6절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앙 교육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좋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신앙에 입각한 가정교육에 힘쓰심으로 자녀들로 인해 웃음꽃이 피는 행복한 가정을 가꾸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가정이 위기를 만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가정의 역할 가운데 상당 부분을 국가가 맡아서 감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병든 가정들을 치료하고 성경적인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비숍은 ‘스위트 홈’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일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우스가 아니라 홈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건물에 불과한 집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가정의 창시자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부부가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가족 간에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데 힘쓰고,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성도님들의 가정 마다 하나님께서 창시하신 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하여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가득한 가정 천국을 이루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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