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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를 볼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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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볼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 (엡 6:1-3)

얼마 전, 한 목사님의 부친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그 장례식이 특별했던 것은 이 목사님이 최근에야 자신이 업둥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50세가 넘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사님은 한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심하게 겪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옆에서 지켜보는 친구로서 부모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그 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 다른 집 대문 앞에 버린 아버지,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법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품어주고 화해하고 또 장례식까지 치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예수님 안에서 부모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점에서 기독교나 다른 종교나 학교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렇다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부모를 향해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부모와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부모의 잘못이 있습니다. 남들이 알 수 없는 그 사람 만의 고통과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잘못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일까요? 큰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흠이 없이 자녀들에게 잘하였다면 부모를 잘 공경하였을까요?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신 분이고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효자입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지 못한 자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성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얼마나 사랑이 많은 분입니까? 그러나 탕자가 나옵니다. 큰 아들은 잘했습니까?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만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탕자나 큰 아들이나 다 우리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도 우리가 효자가 아님을 보면서 부모님과의 문제가 꼭 부모의 결함과 허물과 부족함 때문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부모를 바라보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부모를 바라보면 결코 부모를 원망만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가정에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다면 부모의 죄냐, 우리 죄냐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의 관계 회복도 부모가 바로 되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어 자기의 몸을 속죄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날마다 주님의 동행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용서 못할 부모가 없고, 사랑하지 못할 부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늘 자신감이 없고, 기쁨도 열정도 없이 살았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다가 도무지 더 못하겠다고 아내에게 상담을 왔었습니다. 아내는 이 집사님의 반복되는 침체에는 깊은 원인이 있다 싶어 성령님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권했답니다. 그 때 어려서 친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일이 드러났습니다. 오빠 친구들에게도 당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것을 알고도 쉬쉬했습니다. 오빠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고 오히려 이 자매를 구박했습니다. 끔찍한 육신과 마음의 상처, 죄책감, 그리고 배신감과 상실감이 너무나 컸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잊어 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내와 삼당하면서 드러난 그 문제는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었습니다. 정결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빠를, 부모를 용서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이 집사님이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밝아졌고, 어떻게 이렇게 똑똑할 수 있나 할 정도로 변했습니다. 

효자에게는 어떤 부모도 다 좋은 부모라고 했습니다. 효자의 눈에는 부모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감사할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성도에게도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됩니다. 부모님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부모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지라도, 십자가의 사람이 되고 나면, 부모님은 오직 감사의 대상일 뿐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모시고 공경한 것은 나오미가 완벽한 시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룻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방 여인이고 과부였지만 보아스라는 새 남편을 얻고,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중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새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당연히 사춘기 시절에 새 어머니와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대학에 다닐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밤마다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해나갔습니다.   어느 날 기도원에 1주일 다녀온 후 새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어머니 제가 잘못한 일을 다 용서해주세요.”그 때 새 어머니가“그래. 나도 잘못한 일이 많다. 나도 용서해라.” 이러면 아름다운 한편의 드라마가 되었을텐데 새 어머니는“그래. 알았으면 됐다. 얼마나 잘못했는지 이제 알았니?”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상처가 날 일이지만 이 집사님에게는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한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새 어머니와 이 집사님 사이는 친 어머니와 딸 같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새 어머니는 이 집사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칭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머니를 보니 주님이 역사하셨던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의 삶의 핵심 원리를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입니다. 자연인의 삶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해도 기독교인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 이전의 믿음 없는 삶과 새로운 삶을 술 취한 사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의 차이에 비유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알고 모르고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아니고의 차이입니다. 능력의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충만하라” 이 교훈을 가장 먼저 가정 생활에 적용하셨습니다.
가정 생활이 모든 삶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행복한 가정생활의 핵심 원리는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젊은이교회에서 5월 첫 주간에“부모를 위한 특별 새벽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특별 기도를 한다면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기 마련인데, 자녀가 부모를 위하여 기도한다! 너무나 특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청년들이기에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젊은이교회 한 청년이 기도 편지를 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전도하려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점심 금식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마음이 많이 열리셔서 내일 교회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확실한 답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문이 내일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평생 제일 큰 소원입니다.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셔서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정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부탁의 말씀 1. 기도문을 받으셨으면 꼭 저희 아버지 000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2. 기도 후에 전화하셔서 내일 교회오시기로 하셨다면서요? 잘 하셨습니다. 내일 만나시지요. 하고 반갑게 전화해 주십시오. 전화 00000005]  

이 청년이 5살 때 3살 된 동생을 두고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고 집을 나가셨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마저 집에 들어오시지 않으시니 자기도 동생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되더랍니다. 그래서 다섯 살된 아이가 이웃 집에 가서 사정을 하여 겨우 밥을 얻어먹고 살았답니다. 비뚤어져도 한참은 삐뚤어졌을 이 아이가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아버지를 위해서 너무나 간절히 기도가 되더랍니다. 아버지가 술 취해 들어오면 아버지 머리 잡고 기도했는데, 아버지가 이불 뒤집어쓰면 발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군에 갈 때가 되었는데, 간절히 기도가 되더랍니다. 군에 가기 전에 아버지를 전도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할 때, 성령충만하여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효도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효도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시면서 이것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범사에 복을 주시고 평안함과 축복 속에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전 우리나라는 부모님을 참으로 극진히 모셨습니다. 50년 전만 해도 빨리 늙고, 빨리 노인이 되기 원하는 나라라고 말해질 정도였습니다.

고종 황제의 밀사 노릇까지 했던 헐버트 "이 세상에서 효행이 최고인 나라는 조선이다."
미국공사를 역임했던 샌즈, 회고록에서 "나의 노년을 위해 조선 땅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은 "조선은 늙음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노인의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나라였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건지시고 복을 주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거역하는 일을 쉽게 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당시 세상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습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임합니까? 26절부터 27절에 보면 동성애가 무서운 죄임을 지적하십니다. 
26-27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리고 28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죄를 열거합니다. 

28-31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끔찍한 죄의 목록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추정되는 디모데후서에서도 그렇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런 때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를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 “부모를 거역하는” 죄를 말씀하십니다. 

딤후 3:1-4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그렇습니다. “부모에 대한 불순종”을 배교의 시대, 즉 세상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불신앙의 시대에 나타나는 죄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불순종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말세의 증거요 파멸의 증거인 것입니다.

`한국의 그룬트비'로 불리는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교장이 자유당 시절, 흥분한 대학생들 앞에서 행한 연설 한 토막입니다.

"데모할 줄 모르는 젊은이는 희망이 없다. 불을 지르고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데모가 아니라 폭동이다. 평화적 시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데모를 해야 한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은 사람은 데모할 생각을 하지 마라. 데모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효도를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애국을 논할 수 있겠는가. 뿌리없는 나무는 없다. 마찬가지로 부모없는 자식도 없다. 부모는 자식이 성장하는데 거름이 된 것을 기쁘게 여기며 죽어가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큰 죄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두번째가 `불효'다." 

지금 우리가 새겨 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기가막한 것은 신앙을 빙자하여 부모님에게 불순종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 15:5-6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경건하다던 이들이 행하던 행태입니다. 그들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 핑계를 헌금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지요 물론, 저의 마음은 부모님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이미 드렸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도 이런 교인들이 있다면 사탄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활동은 열심히 하면서 부모에 대하여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태도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부모를 실족시킵니다. 교회는 다닐지 몰라도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도 안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할 눈이 뜨이고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
저는 3월에 복음학교를 졸업하고 말씀이 실제가 되어 주님 좇는 젊은 청년입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큰일 났지요^^ 

오직 기도와 말씀대로만 살려는 제게 부모님은“넌 왜 그렇게 유별나게 예수를 믿니, 교회 가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못 가겠다.' '꼴도 보기 싫으니 집 나가라.' 등의 말을 하십니다. 
그래도 주님이 저와 저희 집을 구원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고 잘 버티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어머니께서 큰 소리로 우시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웃고 넘겼는데 오늘은 그렇게 못하겠더라고요.

어머니가 우시는 것을 보고  교회가서 목 놓아 사단을 대적하고 깨부셨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정처없이 걸어다니며 하나님께‘집을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느냐’물어도 답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주님 사랑하고 주님 믿고 주님께 모든 것 의탁했는데 왜 이리 부족하지? 이건 뭐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저에게 빠진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요. 네. 저에겐 사랑이 없었습니다. 저에 대해서 기도할 때도 믿음만 구했지 사랑은 구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말씀 중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듣고 뒤통수를 발로 걷어 차인 기분이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저에게는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믿는다며 험한 말을 하는 부모님이‘믿음없어 그렇다. 왜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나?’라며 부모님을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에게는 더욱 큰 부담만이 다가왔고 고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에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이제야 평안이 찾아오네요. 
목사님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님 안에서 부모를 공경함으로 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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