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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픔과 기쁨의 확실한 증거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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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기쁨의 확실한 증거 (눅 15:11-32)

탕자의 비유는 모든 설교가들의 십팔번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많이 익숙한 이 비유를 통하여 무슨 새로운 메시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깊이 담겨 있는 메시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굳이 인간의 도덕적인 타락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경험, 하나님을 실감하게 되는 인생의 계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세속화를 완성한 나라라고 자부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들의 공적인 삶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대규모 학살사건이 발생했지요. 몇 달 전 한 청년이 총을 들고 청소년 캠프를 찾아가서 수십 명을 쏘아 죽인, 온 국가가 충격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이 문명의 진화에 의해서 완벽한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에요. 문명인이든 민주인이든 노르웨이인이든 인간 속에는 여전히 폭력의 불씨가 남아 있고 죄의 유혹과 원초적인 불안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적인 삶에서 몰아낸 것을 그들의 공적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동물농장 · 1984년 같은 작품을 쓴 조지 오웰은 생전에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기독교인들을 경멸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을 인간답게 대우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종종 느끼는 유혹은 우리가 짐승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짐승은 양심이나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본능에 의해서 사는데 왜 인간이라고 양심과 종교에 매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도 짐승처럼 본능을 따라서, 욕망을 따라서 살면 되지 않을까. 우리가 갖고 있는 양심 · 신앙 · 도덕 · 윤리가 인간이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입게 된 옷이 아닐까.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닌데 문명화 되는 과정에서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필요한 법규를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갖게 된 것이 아닐까.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면 언젠가는 갖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까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원시인이 빙하 속에 보존되었다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사람이 수만 년 전에 돌에 맞아 사망했는데 그 몸이 얼음 속에 놀랍도록 잘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원시인이 그 당시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까. 그 당시 사람들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을까. 아니면 신앙은 이후에 개발이 된 것일까. 

성경은 원시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간이지만 성경은 그들을 원시적인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최초의 자녀였지만 성경은 그들이 원시적인 삶을 산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성경의 기록과 실제 인류의 경험 간에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거대한 거리, 거대한 시간적인 갭이 존재하지 않는가. 성경이 상당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가 여러분에게 회의를 심어드리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믿음을 도와드리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갈 때까지 간 상황에서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습니다. 소위 막장이라고 부르는 갈 때까지 간 상황에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거리가 될 수도 있고 지적인 거리가 될 수도 있고 지리적인 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갈 때까지 갔더니 거기서 아버지 생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광야 끝에 갔더니 하나님이 계시더라는 성경구절과도 비슷합니다. 내가 어디를 가도 하나님이 계시고 어디를 가도 하나님이 계시다 이런 성경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갈 때까지 가지 못한 것입니다. 갈 때까지 가 본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틀렸는가를 깨닫습니다. 

탕자가 갈 때까지 가보니까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옳은 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옳은 길이 없다면 틀렸다는 깨달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옳다는 사실, 아버지가 애초부터 옳았다는 사실. 다만 본인이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한데 나는 여기에서 주려 죽는구나’ 비로소 이 사람은 철이 든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은 인간에게 그것보다도 괴로운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귀중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 고난을 허락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은 굉장히 괴롭지만 그것은 귀중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은 인정할 줄 압니다. 인간의 선택이 자기 자신에게 슬픔을 주거나 남에게 깊은 슬픔을 줄 때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틀렸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짐승이 슬픔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짐승은 감정이나 슬픔이 아닌 본능을 좇아서 삽니다. 짐승이 애통하며 슬퍼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애통합니다. 슬픔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의 슬픔뿐만이 아니고 남의 슬픔을 느낄 줄 압니다. 만일 인간이 진화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슬픔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슬픔은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냉정한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뱀처럼 냉정한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슬픔을 느끼는 것뿐만이 아니고 남의 슬픔을 느낍니다. 그것처럼 괴로운 경험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슬픔은 인간이 짐승이 아니요 영혼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반전의 가능성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슬픔을 느낄 때 슬픔이 끝이 아니고 거기에서 나의 슬픔을 위로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경험입니다. 예수님이 괜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위로가 언제 임하느냐. 애통할 때 위로가 임합니다. 

그렇다면 위로하는 분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위로하는 분이 계셔야 사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역설적이지만 사람이 애통할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인성 과부가 아들을 장사하러 묘지로 가면서 애통해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멈춰 서셔서 그 죽은 아들에게 ‘청년아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했더니 그 청년이 일어나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나인성 과부가 애통해하는 장면을 예수님이 보실 때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왜 인간의 삶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셨느냐? 그 크신 섭리를 우리가 다 이해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슬픔이 끝이 아니다, 죄가 끝이 아니다, 괴로움이 끝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슬픔이 인간이 극복해야 될 번뇌로 여기지만 성경은 슬픔이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요 인간이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요 인간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허무해야 될 이유가 아니고 믿음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기뻐했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기뻐했다. 기독교 신앙에는 고난도 인정하고 슬픔도 인정하고 인간의 죄를 설정하고 또 죄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이 있는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올 때 기쁨이 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기뻐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슬픔이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이 있다면 기쁨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이 있는데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기쁜 것처럼, 예수님께 가면 나는 기뻐요 하는 것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기쁜 것처럼, 성령의 열매에 기쁨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기쁜 것처럼, 기쁨이 증명하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바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올 때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갔을 때 슬픔이 있었던 것만큼 돌아왔을 때에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미련합니다. 왜 슬픔을 겪어봐야 자신의 선택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자신의 슬픔이든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끼친 것을 알고서야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슬픔이 증명하는 것이 있고 기쁨이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이전에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이 쓰신 아주 기본적인 원칙인 것입니다. 

만일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면 슬픔이나 배고픔이나 고독함이나 수치나 괴로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깊은 기쁨도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이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지 않습니까. 기쁨의 자리에 동참하기를 거부합니다. 만일 동생이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동생도 형과 같았을 것입니다. 슬픔을 겪지 않지만 동시에 기쁨도 겪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다 되돌아 왔기 때문에 슬픔을 겪었지만 기쁨도 경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류의 경험입니다. 

우리 모두는 탕자와도 같습니다. 슬픔 다음에 기쁨이 있고 시련 이후에 위로가 있고 죄 다음에 사함이 있습니다. 어둠이 있은 후에 빛이 있습니다. 낮아진 다음에 높이십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씨앗이 썩어진 이후에 열매를 맺습니다. 고난 이후에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래부터 그렇게 계획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간 이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모든 후회한 세월과 그 모든 괴로움의 시절이 허비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후회와 그 많은 허비된 시절과 그 많은 괴로움이 있었지만 인류의 경험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시고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게 하시고 그 괴로움이 변하여 주님의 잔치 자리에 이를 수 잇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심으로 결국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간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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