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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9-17, 행 10:44-48, 요일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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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9-17, 행 10:44-48, 요일 5:1-6)

<멋쟁이 하나님>
    
오늘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이자 어버이 주일입니다. 출 20장 12절은 말씀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엡 6장 2절도 말씀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하늘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은 땅의 아버지도 잘 섬겨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녀가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께 순종할 리가 만무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어버이를 잘 공경하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목회일기에 “멋쟁이 하나님”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후에 1년이 지나고 교육전도사로 처음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양복이 한 벌도 없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전도사로 면접을 보아야 하는데 양복이 없습니다. 보내주시든지 살 수 있는 돈을 주시든지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결국 양복도 물질도 보내 주시지 않아서 면접을 보지 못하였다. 좌절하여서 하나님께 푸념하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고 학교에 싸간 도시락도 엎고 정말 비참했다. 친구 전도사가 요번에 면접을 보는데 교회 집사님이 양복을 사주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하나님이시라고 침을 발라가며 간증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너무 화가 나서 ‘하나님 이게 뭡니까? 왜 이렇게 차별대우하십니까?’
    
그런데 며칠 후에 매형이 잠시 와 보라고 했다. 누이는 집에 없었고 매형만 있었다. 양복을 보여주면서 오십만 원 주고 양복을 샀는데 자꾸 처남만 생각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양복은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처남 주라고 그러는 것 같다고 하면서 양복을 주었다. 양복을 받아들고 집에 오는데 하나님 앞에 원망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훗날 면접 보러 간 교회에 담임목사님 딸과 결혼도 하게 되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먼저 양복을 주셨더라면 첫 번째 교회에 가게 되었을 것이고, 지금의 사랑스러운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뒤돌아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두 번씩 다했을 것입니다. 기대했던 것이 좌절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길고 짧은 것은 재봐야 압니다. 지금 당장만 보지 마시고 나중을 생각하십시오. 지금 당장 실패하는 것이 나중에 더 큰 성공과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고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 사랑→예수 사랑→우리 사랑>
    
오늘 봉독한 요 5: 9-17절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준 고별인사입니다. 제자들과의 작별을 앞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요. 이 말씀에서 중요한 주제는 사랑입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면, 이 사랑의 연결고리는 당연히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 다음에 12절을 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와 같이 본문은 “사랑”이 중심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다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차례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입니다. 사랑의 사도가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우리 다함께 요 13: 23절을 찾아봅시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여기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름과 직장과 성격과 학력과 직업과 가족 사항 등등 많은 대답이 나오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미국교회에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유치부에 가서 분반공부를 합니다. 수업이 다 끝난 다음 교실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아이에게 목사님이 묻습니다. “사라야, 오늘 선생님에게 어떤 것을 배웠니?” “Jesus loves me!” “예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 후 유치부 교실에서 나오는 사라에게 목사님이 “오늘도 무엇을 배웠니?” 물을 때마다 대답은 늘 한결 같았습니다. “Jesus loves me!” 참으로 기가 막힌 명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교회에 가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일랜드의 어떤 목사님이 시골 마을을 도보로 여행했습니다. 한 나이 많은 농부가 길가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감명을 받은 목사님이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하나님과 굉장히 가까우신가 봐요!” 잠시 생각을 하던 농부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하나님께서 저를 굉장히 좋아하시지요.”(Yes, God is very fond of me.)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하신 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켜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역시 예수님의 계명을 힘써 지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예수의 친구가 되고>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14절을 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친구의 사랑, 즉 참된 우정은 이기적 사랑이 아닙니다. 친구를 위하여 기꺼이 나의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이타적 사랑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13절에서 참된 우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 예수님은 친구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짝 야윈 83세의 할머니 마더 테레사가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조찬 기도회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연설을 하기 위하여 간신히 마이크에다가 허리를 굽힌 상태에서 했던 말은 이것입니다. “미국은 이기적인 나라가 되어서 사랑의 바른 의미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사랑은 아프기까지 주는 것입니다.”(America has become a selfish nation, in danger of losing the proper meaning of love: ‘giving until it hurts.’)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사랑은 “아프기까지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늘 좋은 감정, 긍정적 생각, 행복감, 이런 것만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프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 참된 우정은 “내가 준만큼 받는다.”는 물물교환식 거래가 아닙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참 우정이 아닙니다. 친구를 위하여 아프기까지 피를 철철 흘리는 희생적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량품 인생을 선택하시는 예수님>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구절이 16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여 세워주셨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지요. 우리가 잘 났기 때문에, 믿을만 하기 때문에 친구로 선택하여 세워주신 것이 아닙니다. 못나고 전혀 믿을만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 짝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찍어서 친구 삼아주신 것입니다! 
    
어떤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농구 시합을 하기 위하여 팀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체육 선생님이 청군과 백군의 주장을 먼저 뽑아서 두 주장이 자기편이 될 선수들을 차례로 뽑게 했습니다. 청군 주장은 농구를 가장 잘 하는 유능한 선수부터 먼저 뽑아 팀을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백군의 주장은 달랐습니다. 가장 못하는 선수부터 거꾸로 뽑았습니다. 누가 봐도 게임에 이기기 위하여 선수를 뽑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청군과 백군이 농구시합을 하는데 당연히 백군이 지고 말았습니다. 백군의 주장은 스포츠란 이기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비록 백군은 게임에 졌지만 누구 하나 이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레크리에이션을 할 때에도 편 가르기를 할 경우, 게임을 잘 하는 사람부터 먼저 뽑지요. 그래서 맨 나중에 불려나간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를 느낍니다. 먼저 뽑힌 사람은 자기가 잘 나서 먼저 뽑혔다고 생각하고서는 쓸데없는 우월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맨 나중에 뽑힌 사람은 자기가 뭔가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하고서는 열등감이 생길 수도 있지요.
    
우리는 이럴 때마다 예수께서 당신의 미션 팀에 들어올 선수들을 어떻게 뽑으셨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승리를 목표로 하는 종교 게임을 하기 원하셨다면 당연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먼저 뽑으셔야 했겠지요. 그들은 누가 봐도 경건했고 기도도 많이 했고 성경도 많이 알았고 율법의 조목조목까지 세세하게 지켰고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열등생부터 뽑으셨습니다. 회사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불량품이 나오면 안 됩니다. 무조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불량품 인생을 먼저 뽑으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들을 선수로 뽑으셨습니다. 거칠고 참을성이 없고 과격합니다. 사기꾼의 대명사였던 세리를 선수로 뽑으셨습니다. 과격한 열심당원을 선수로 뽑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불완전하고 자격 없고 흠이 많은 이들만 골라 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게임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 그냥 인간미 넘치는, 즐기는 경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께서 먼저 우리를 친구 삼아 주셨습니다. 결코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유능해서도 아닙니다. 불완전하고 자격 없고 흠이 많은 불량품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뽑아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진정한 친구는 아프기까지, 철철 피 흘리기까지 서로 사랑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친구가 됩시다! 
    
이제 우리 다함께 요일 5: 1-2절을 읽으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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