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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 합당한 자 (마 10: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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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합당한 자 (마 10:34-42)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군의 어느 구축함 함장이 취임하던 첫날에 자기 휘하의 수병들에게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이 배는 전투를 하기 위해서 있는 배다. 그리고 나는 전투가 있는 곳만을 부지런히 찾아다닐 것이다. 만약 여기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하선하라."는 말이었는데, 그 이후로 그 함장의 훈시는 모든 미 해군 구축함의 슬로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함은 전투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함장은 그 전투를 지휘하기 위해 앞장서는 사람인데, 만약 그런 지휘관의 임전태세를 철저하게 따를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그 배에 없는 것이 백번 더 나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바로 그와 같은 엄중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열두 제자들을 전도의 현장으로 파송하시는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데, 33절 이전까지에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 격려의 말씀을 내려 주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 훈시의 정점에 이르러서 그야말로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34절에 기록된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싸움을 붙이려고 왔다.'는 이 주님의 말씀은 그 열두 제자들로서는 실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예언된 대로 분명히 메시아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분이며, 예수님 당신께서도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화평'을 가르치시는 '평강의 왕'께서 '나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온 사람이다.'라고 하시니 제자들에게나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나 일단은 충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모순된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강과 화평의 선포가 '그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평화만을 지켜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에는 필연적으로 원수 마귀와 전쟁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며 그때에는 결코 피하거나 당하지 말고 맞서 싸워 이겨야만 할 것을 독려하시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 동참하느냐 아니면 방해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전투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화평이라는 미명 아래 적당한 타협이나 미지근한 중립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애당초 당신을 따라올 생각부터 하지 말라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실로 엄중한 훈시를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이 복음 전파의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주께 합당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기 위하여 꼭 지켜야 할 임전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보다 불신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주께 합당한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 35절부터 3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극단적인 선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불화하게 하려 함"이란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자기 가족과 마땅히 나누어야 할 기본적인 애정 그 자체를 부인하신 것은 물론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가족까지도 영적으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바른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영적 전투란 그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나라와 나라를 대립시키고, 민족과 민족을 분단시켜왔을 뿐 아니라, 때로는 "자기 집안 식구"조차 원수로 만들 정도인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타나는 가인과 아벨의 경우가 그 첫 번째 경우로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문제 때문에 형제지간에 살인까지 발생했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아비가일은 고집불통의 불신 남편 나발로 인하여 무척 큰 갈등을 겪었지만 끝내 자신의 신앙만큼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5장 13절에 유다왕 아사는 신앙 문제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우상숭배에 빠져 버린 자기 어머니를 끝내 태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기까지 했던 것이었습니다. 

신앙문제로 인한 혈연간의 이 같은 갈등은 오늘날도 아주 흔히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게 된 후 또 특별한 소명까지 받아서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 아들이 자기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을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아비와 자식 간의 영적 전투는 시작됩니다. 
멀리 오지로 갈 선교사의 사모가 되기로 작정한 딸과 그런 일은 본인의 인생을 망치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 사이는 자연히 또한 영적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일을 꼬박꼬박 지켜야 하는 며느리와 그런 며느리를 고깝게 보는 시어머니 사이에는 또한 서로가 질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이런 경우를 실제로 당하게 되면 일단 큰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순간이야말로 '자신과 예수님과의 영적 사귐'을 택하느냐 아니면 '자신과 가족 간의 혈연관계'를 택하느냐 하는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라고, 이것은 '화평'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검'을 들고 싸워 이겨야 할 영적 전쟁이라고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혈연관계는 물론 모든 인간관계들 중에서 가장 가깝고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놓쳐서는 결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가족의 반응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사람은 사실상 원수 마귀에게 '화평하자'고 백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지는 38절과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신자의 영적 원수가 될 수 있는 의외의 대상은 가족뿐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자신'이 그처럼 오히려 예수님의 원수가 됩니까?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라고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는 자기가 매달리게 될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을 장소에까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는 자세만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고 편하게만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라고 즉 '내 편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을 사서 하라는 고행주의를 가르치신 적은 결코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단 예수님을 좇는 신자가 되고자 할 때에는 각자에게 주어진 만큼의 십자가의 몫은 분명히 있기 마련입니다.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느라고 바빠지기도 할 것이고, 헌금을 바치느라고 힘이 들 때도 있을 것이고, 선한 일에 봉사하느라고 피곤하기도 할 것이며, 맡은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느라고 좀 고달플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비록 무게는 다르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신자로서 바로 자기 자신이 꼭 책임지고 스스로 짊어져야 할 짐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기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고 그냥 기독신자 행색만 내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만 희생과 충성은 전혀 바치지 않고 따라가겠다는 뻔뻔스러운 교인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전투의 현장에서 자기의 임무를 다하지 않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병사는 다른 모든 전우들의 사기를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자로서 오히려 적군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전선에서 이탈하는 병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라도 즉시 사살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기 인생 하나만 조금도 손해 없이 지키겠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하는 영적 탈주병은 비록 겉에는 같은 군복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예수님께 합당한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는 이미 아닌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엄한 경고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 '얻다'란 말은 '찾다, 보존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기 인생만 감싸고도는 사람은 결국 자기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는 빈껍데기 신앙으로 끝나고 말 것이며, 반면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까지라도 바로 따라가는 자만이 구원의 완성인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 교회에 다니는 것도 좋지만 제 부모님이 펄펄 뛰며 못 가게 하시니 나중에 제가 독립하게 되면 그때쯤 가도록 하지요."라든지, "지금 수입으로는 한 달 생활비 맞추기도 빠듯한데 어떻게 십일조를 하겠습니까? 좀 기다렸다가 형편이 풀리면 그때 가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교인은 '당신께 합당한 자'가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처럼 불신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예수님보다 실상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기는커녕 이미 적군의 포로가 되어 있는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되 자기 가족보다는 더 아래에 두거나, 예수님을 섬기기는 하되 그 우선순위를 자기 인생 다음에 두는 것은 사실상 이적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탈주병이나 마찬가지임을 꼭 기억하고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명하신 복음 전파를 위하여 '가는 전도자'와 '보내는 전도자'만이 '주께 합당한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진정 '당신께 합당한 자', 복음전파의 전투현장에서 정말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진짜 같은 편의 '그리스도의 군사'가 어떤 신자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40절과 41절에서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란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파송하고 계시는 열두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송하신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 당신을 영접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또한 "나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동격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친히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소원(固所願)'이나 '불감청(不敢請)'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이 바로 그런 엄청난 영광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한 명을 뽑아서 그 집에 친히 찾아오겠다고 하시면 신청자가 줄을 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그저 심방 오는 교역자를 기쁘게 맞이하고 정성껏 대접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직접 모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41절에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혹은 "의인의 이름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 사람이 선지자인 까닭에' 혹은 '그 사람이 의인이라는 이유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분은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니까 최고로 모셔야지.' 혹은 '이 전도사님은 우리 교구를 위해 늘 수고하시는 교역자님이시니까 내가 약소하지만 교통비라도 드려야지.'라는 마음으로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런 자세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그 사람도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고, 똑같은 식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 역시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목사를 목사라는 이유로 영접하는 성도는 그 목사가 받게 될 상과 똑같은 상을 받게 될 것이며, 선교사를 선교사라는 이유로 대접하는 성도는 그 선교사가 받게 될 상과 똑같은 상을 받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상급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모든 신자가 다 목사나 선교사나 전도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전투하는 병사가 있으면 그 뒤에는 병참 보급을 맡은 병사도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은 '선지자'와 '의인'의 사역에 직접적인 소명은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로 그런 '가는 전도자'들을 뒤에서 지원해 주는 '보내는 전도자'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일선에 나가 있는 전도자들을 정성을 다해 후원하는 성도 역시 똑같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가는 전도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불공평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목사로, 선교사로서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나 그런 전도자들을 대접하고 후원한 평신도나 상은 똑같이 받게 된다는 것은 좀 너무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42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기를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앞 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제자라는 이유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보면 "이 소자 중 하나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처음에는 "제자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해 놓고서 '이 제자 중 하나에게'라는 말이 따라와야 할 부분에서 갑자기 "이 소자 중 하나에게"라고 말을 바꾸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실수'를 하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의도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소자"란 문자적으로는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어린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본문의 문맥에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문맥과 연결시켜 볼 때에 여기서의 "소자"는 바로 앞에 나온 "제자"와 동격으로 사용된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제자'를 '작은 자'라고 부르신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께로부터 파송을 받아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지극히 작은 자'로만 보일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자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인 것을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보내시는 예수님께서 잘 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가는 곳마다 별 볼 일 없는 귀찮은 사람으로만 취급당하던 전도자들이 자기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얼마나 반갑고 고맙겠습니까? 사람들로부터 "소자"라고 냉대와 멸시를 받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그 "제자"에게 누군가 자기를 '선지자라고, 의인이라고' 알아주면서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식사 한 끼라도 대접해 주면 그 얼마나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버마로 진격해 들어가던 때에 한 일본군 부대가 영국군이 주둔해 있던 진지를 포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포위 공격'은 일본군의 전형적인 수법이며 또한 필승전법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아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포위되어 있는 영국군은 자국 비행기가 공수해 주는 보급품이 넉넉해서 식량과 탄약 조달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버마의 울창한 밀림 속에 고립된 일본군은 각자가 배낭에 짊어지고 갔던 보급품이 떨어지게 되자 전투는커녕 그 자리에서 굶어 죽을 시간만 기다리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본군 전투기 한 대가 그 위를 지나나게 되었습니다. 
그 조종사는 지상에 있는 아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래서 그는 현장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소지하고 있는 조종사의 비상식량을 조종석 유리창 밖으로 그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조금 후에 지상에 있던 그 일본군 부대의 대장으로부터 그 조종사에게 무전 연락이 왔습니다. 
그것은 "아 부대는 실로 오랜만에 아군의 비행기를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귀관께서 귀중한 식량까지 투하해 주셔서 사기 백배로 충천. 이제 이 식량을 나누어 먹은 후에 부대원 전원이 적진에 돌격하여 옥쇄하기로 결정함."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종사 한 사람의 비상식량이라는 것을 한 부대원 전체가 나누어 먹는다면 그 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군이 던져 준 그 한 입도 못 될 적은 양의 식량은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모든 부대원들로 하여금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적진을 향해 마지막으로 돌격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들이 아파트 방문전도를 하다가 관리인들로부터 구박을 당하게 되고 부목사님들이 심방을 다니면서 문전박대를 당하다 보면 아무리 교역자라 해도 역시 인간인지라 때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이 각박한 현대인들로부터 '소자' 취급을 당하면서 낙심해 있던 교역자에게 누군가가 "수고 많으십니다. 저도 교회에 다녀요."라고 하면서 '그가 선지자라는 이유로' 음료수 한 잔이라도 대접해 주면, 어쩌면 그 다음 주일에 사직서를 낼지도 몰랐을 그 전도자가 자신의 평생을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바치며 충성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현지에서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협박을 받거나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인 공무원들로부터 '지극히 작은 자' 취급을 당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그런 최전선의 전도자들에게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 금요일 밤 철야기도회 때마다 기도로 지원하고 비단 선교주일뿐 아니라 매달 각자가 작정한 선교회비를 통하여 꼬박꼬박 선교비를 보내 드릴 때에 그것을 받는 선교사님은 바로 그 '냉수 한 그릇'에 사기충천 용기백배하여서 순교의 자리에까지도 돌격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보내는 전도자'가 '가는 전도자'를 후원할 때에 바로 그런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에게 그가 대접한 선지자가 받게 될 상과 똑같은 상을 주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영혼을 찾아오느냐 빼앗기느냐 하는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구속사의 종말 시대에 '선지자와 의인과 제자'의 사명을 받아 '가는 전도자'가 되든지 혹은 그 '소자들을 영접하고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여' 힘을 북돋우어 주는 '보내는 전도자'가 되어서 그 영광스러운 상급을 똑같이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싸울 생각이 없는 수병은 차라리 이 배를 떠나라.'고 했던 어느 함장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도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에 몸은 담고 있지만 내게 합당치 아니한 자가 있다.'라고 엄중한 훈시를 내리고 계십니다. 
불신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는 사실상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서 있는 군사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오직 전도의 최전선으로 용감하게 나아가든지 아니면 그들을 대접하고 후원하는 지원병이 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합당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불신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영적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라는 말씀, 즉 그들의 핍박을 인내로써 극복하고 오히려 그들을 전도해 내라는 말씀입니다. 
더 어려운 상대는 불신가족보다 더 가까운 곳, 바로 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총 한 발 쏘지 않고 자기 몸만 사리는 이기주의자는 적군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교인들은 '내게 합당하지 아니한 자'라고, 아예 당신의 제자로 따라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사가 걸린 이 힘들고도 중차대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며 피차 도와 줄 줄 아는 든든한 우군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정쩡하게 중간에 서서 사실상 원수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교인이 되지 말고, 확실히 예수님 편에 서서 복음 전선의 최전방으로 '가는 전도자'와 그들을 기도와 물질로써 후원하는 '보내는 전도자'가 됨으로써 실로 '주께 합당한 자'로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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